백부님의 동생들 관리 (146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백부님 내외분은 동생들에게 공평하려고 신경을 많이 쓰신 것 같다. 둘째 할머니 아들들이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데모를 했을 때 조부님과 담판을 하던 백부님은 배다른 동생을 괄시하면 ‘두고두고 집안의 화근이 됩니다.’ ‘통촉하시옵소서!’ 하며 간곡히 할아버님을 설득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끝으로 재산분배까지도 비교적 공평했다.

올바른 직장만 가진다면 상토(上土) 100마지기(약 20,000坪)유산으로 받으면 평생 먹고 자식 공부시키고도 남는다고 백부님은 주장하셨다. 그것으로 「씨앗 종자돈」이 되어 잘 굴리면 부자도 될 수 있다는 지론을 항상 내세웠다. 따라서 재산분배에 별 탈이 없었고, 더군다나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사실상 농토가 모두 손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뒷일이 조용했다.

백부님을 우리 후손들이 특히 존경하는 것은 동생사랑이 극진했다는 점이다. 질병에 걸리거나, 재판 등으로 곤경에 빠지거나, 까다로운 혼사 문제가 야기되면 솔선해서 장자로서 응분의 대처는 물론이고 자기 자식 이상으로 애정을 갖고 해결해 나갔다. 이것과 관련된 일로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첫째 : 희주(禧周) 숙부가 유학 시절 아주 심한 결핵을 앓고 일본병원에 입원해서 장기치료를 받게 되었다. 우리 아버님이 옆에서 수발했지만 백부께서 동경으로 쫓아오시고 병세를 확인한 다음 적절한 조치를 우리 아버지에게 명령하고 가셨다.

당시 특이한 치료 방법이 없는 마당에 영양공급과 가슴에 붕대를 세게 감고 구멍 난 폐를 압박하는 물리적인 치료가 전부였다. 우리 아버지는 동생의 병구완을 하면서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고 한다. 동생의 잠자는 자세가 잘못되면 매번 교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수개월의 집중적인 병원치료 후 병세가 호전되면서 귀국하여 요양을 하게 된다. 폐병에는 구렁이, 독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문 땅꾼을 고용하여 수집을 했고, 동네 사람들도 구렁이를 발견만 하면 잡아다 주면서 짭짤한 용돈벌이도 했다. 큰 구렁이는 1원, 살모사는 50전 정도로 기억한다. 

사랑채 처마 끝에 큼직한 나무상자 두 개가 있어 분류하여 뱀을 보관하고 하루 두 번 오전, 오후에 푹 내려서 먹였다. 이 작업은 주로 백부님이 담당했는데 징그럽기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동생의 병을 지성으로 낫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재단부터 직접 하셨다. 

상자에서 집게로 끄집어내어 노끈으로 목을 묶어 사랑방 앞 감나무에 매달아 주전자 물로 머리로부터 부으면 요동치던 뱀이 똑바로 자세를 잡는다. 그때 예리한 칼로 목 주변을 도려 밑으로 잡아당기면 껍질이 내장과 함께 깨끗하게 벗겨진다. 붉은 살을 토막 내 약탕기에 집어넣고 숯불 화로에서 약 한 시간 정도 끓인 다음 멋쟁이 사기그릇에 국물만 따라 숙부님에게 전달하는 절차를 우리들은 수도 없이 많이 목격했다. 

뱀탕을 따라 마시는 넓적한 사기대접은 영국산(英國産)으로 귀한 손님이 오시면 교자상에 과일을 담아 내놓는 아주 고급 꽃무늬가 들어있는 그릇이었다. 왜 이런 고급 그릇을 사용했을까?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시는 숙부님의 기분도 맞춰주면서 결핵은 전염성이 강하므로 일반 그릇과 구별하기 좋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백부님은 이렇게 <선제경영(先制經營)의 달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업을 매번 흥미롭게 지켜보는 우리들 쪼무래기에게 큰 아버지로부터 가끔 선물이 내려졌다. 뱀으로부터 채취한 눈알을 흰 가루에 굴려서 옆에 있는 동생, 조카들에게 먹게 했다. 특히 살모사, 독사의 경우 그러했다. 이것들은 눈을 밝게 해 준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들에게 먹인다. 주로 나의 형님 진규(秦圭)와 규주(圭周) 삼촌이 수혜자가 되었다.

나는 사탕 하나 얻어먹는 것으로 끝이다. 왜냐하면 아직 뱀눈을 먹기에는 어리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것들이 정말 효과가 있었는지 우리 형님은 83세인 지금도 눈 하나는 20대라고 자랑을 하신다. 젊을 때부터 총쏘기의 명수로서, 수렵의 대가이기도 하다.

희주(禧周) 숙부는 백부님의 이런 보살핌으로 6개월 후 완쾌하여 복교(復校)하였다. 안타깝지만 집에 와 있는 동안, 같은 집에 있던 희주(禧周) 숙모님(악양 작은어머니라 불렀음)과는 한 번도 같은 방을 쓰지 못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폐병에는 여자가 ‘비상(한약-사약)’이라는 또 하나의 속설 때문에 백부님이 한사코 매일 사랑방에서 동생을 데리고 잤기 때문에 부인과의 은밀한 시간, 또는 밀회가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건강을 회복한 숙부님은 중대(中大) 졸업 후 그 어렵다고 하는 철도국에 취직하여 승승장구했고 건강도 좋아서 77세까지 장수했다. 

둘째 : 동생들에게 생활에서 모범을 보이면서 사표(師表)의 역할을 했다. 동경 유학중인 동생들이 하나하나 염문에 휘말리는 달갑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둘째가 <오기도시고(沖 トシコ)>라는 하와이 2세 미녀와 연애를 열렬히 하는가 하면, 셋째가 최승희(崔承喜) 씨의 열렬한 팬으로 가깝게 사귄다, 또는 자신을 간호해 주었던 간호사와 밀애를 한다는 등, 공부하는 동안에 가장 경계해야 하고, 고국에 조강지처까지 있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고 판단하신 백부님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주변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2~3년 전부터 사업 관계로 출입하던 하동읍내의 <송죽관(松竹舘)>에 애인을 두고 있었다. 관계가 깊어지면서 집으로 데려와 인사도 시키고 첩(妾)으로 승인받는 절차까지 밟은 상태였다. 그리고 방학 때 동생들이 동경을 내왕할 때 <송죽관>에 들러 일본요리를 대접받기도 한 자리였다. 그리고 그 당시 돈이 있는 부자들은 하나의 ‘스포츠’ 혹은 ‘사치’로 작은 부인을 얻는 것이 다반사였다. 큰 어머님만 마음고생을 좀 하셨지, 아무도 백안시하지 아니한 일이었다.

이쯤에서 동생들의 오입은 어떻게 보면 설익은 장난으로 보면 되지만 외국에서의 사건은 좀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셋째 같은 분은 건강에 결정적인 해(害)가 될 수 있고 형님의 정성으로 겨우 살려놓았는데 다시 구렁텅이에 빠지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드디어 결단의 날이 왔다. 송죽관의 주인에게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절교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뒷일은 적절히 처리해 주기를 부탁하고 보상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여인을 만나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고 가문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 부득이한 조치이니 이해해 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다음날 그 여인을 다시 찾아갔더니 솔직하게 말해주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더란다. 상당한 현금을 송죽관 주인을 통해 전달했고, 얼마 후 그 여인은 진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까지 확인했다(1945년 1월 추운 겨울, 송죽관 주인이 사망하자 큰아버지의 지시로 장손 진석(秦汐) 형님이 우리집 대표로 문상을 갔고, 형님은 혼자 매티재를 넘기가 좀 무엇했든지 평소 좋아하던 나를 데리고 갔다. 상가(喪家)에서 좋은 음식을 대접받은 기억과 백부님의 애인이었던 그 여인은 일본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그때 여주인으로부터 들었다. 해방되던 해였으니 전쟁통에 물자가 대단히 귀한 때인데 그때도 일본거류민들은 설탕 배급을 받고 있었다. 여주인이 직원(直員-백부님을 호칭)이 단것을 좋아 하신다며 설탕 한 근 정도를 싸주셔서 가져온 기억이 난다.).

셋째 : 소송(訴訟)에 휘말린 동생 구하기- 형제 중에서 가장 유능하면서도 가장 말썽이 많았던 분이 넷째 옥주(沃周) 숙부라 하겠다. 숙부는 <와세다>를 졸업한 후 일본사람들도 취직하기 힘들다는 흥남비료공장(사실은 종합화학공장이었음)에 입사하여 회계과에서 주임으로 일을 시작했다. 

안정된 직장인지라 가족도 데려가 살림을 시작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회계부정에 연루되었고, 사상문제로까지 연결되어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평양의 복심법원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백부님이 함흥으로 쫓아올라가서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무위로 끝나고 평양으로 이송하게 되었다. 사건이 매우 까다로웠다. 동경 유학 시절 절친했던 사회주의 성향(그때 당시 동경유학생 대부분이 그런 쪽에 기울어 있었고, 그것이 당시 ‘인테리’의 길로 생각되던 때였다)의 친구가 상해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독립자금을 모집하느라 요소요소를 찌르고 다니는 중에 자금을 만지는 숙부님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독립운동가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에 숙부가 연루된 것이 발각되어 기소된 것이다. 사상문제로 비화되어 풀기가 매우 어려운 사건이었다. 백부님은 만사 젖혀놓고 거금을 챙겨 평양으로 향했다. 

다행히 평양 지방철도국에 셋째 희주(禧周) 숙부가 근무하고 있어 그 집에 여장을 풀고 다음날부터 변호사를 선임하고, 주변을 동원하여 기민한 구명(求命) 행동을 개시했다. 다행히 철도국 희주(禧周) 숙부의 동창이 법원에 있었고, 일본인인지라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총공세를 편 것이다.

당시는 전쟁 중이라 검찰, 법원의 업무가 매우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어 불과 1개월 만에 결심(結審)이 이루어졌다. 철도국 관리의 보증과 큰 형님의 서약서를 제출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 되고 무죄 석방이 된 것이다. 잘못했으면 수년간 옥살이를 해야만 했던 큰 사건인데 백부님의 집념과 끈기로 모든 것을 풀고 옥주(沃周) 삼촌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처럼 동생의 일도 방관하지 않고 철저히 챙겼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또한 피눈물나게, 그리고 쌀쌀맞게 동생들을 힐책하곤 했다.

고향에 낙향한 옥주(沃周) 숙부는 또 문제에 봉착했다. 전쟁 중이라 군대에 소집되든지 아니면 징용을 가야만 했다.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수소문을 하니 진상초등학교 일본인 교사들이 하나둘 소집되어 군(軍)에 입대하는 바람에 교장뿐 아니라 일반교사들도 여러 명이 결원이 되고 사범학교 졸업 전의 여교사가 배치되는 일까지 벌어지자 백부님은 여기에 착안, 곧바로 도(道) 학무과(學務課)에 쫓아가 옥주(沃周) 숙부의 이력서를 제출하고 임시교사로 임명받아 바로 출근하도록 일을 해결해 냈다.

이렇게 해서 숙부님은 징용을 면했고, 2년 동안 편하게 교사생활을 하면서 생활도 해 나갔다. 그리고 고향에서 2년 동안 지면(知面)을 넓히고 지역에 봉사함으로써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거의 경쟁 없이 당선되는 운을 누리기도 했다.
 
이처럼 백부님은 강렬한 형제애와 가정의 중추로서 확실한 <리더쉽>을 발휘했기 때문에 직원(直員)의 명령이라고 하면 아무도 토를 달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형님 사업에 동생들도 가능한 한 도와드리려고 애를 썼다.

 
  백부님의 부의 신장과 교육관_2 (145회)
  백부님에 대한 에필로그 (14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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