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님에 대한 에필로그 (147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백부님은 집안일을 철저하게 챙길 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충실했다. 대가족을 거느리는 큰며느리로서 고생이 이만저만하지 않았던 백모님은 정말로 현모양처의 표본이셨다. 우선 말수가 적었고, 항상 긍정적이고, 미소로 상대를 녹이는 매력을 지닌 분이셨다. 배다른 시동생도 자기 자식과 똑같이 챙기셨다.

얼마 전 돌아가신 일곱째 범주(泛周) 삼촌의 마지막 병문안을 갔을 때 삼촌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정말로 형수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순천중학 기숙사에서 못 얻어먹어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형수가 병아리 한 마리 푹 삶아 살짝 뒤 툇마루로 불러 나로 하여금 혼자 포식하도록 해 주셨다” 라며 정말로 잊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내의를 사더라도 제일 좋은 것은 삼촌들에게 먼저 입히고, 당신의 아들(진성이 형 등)은 맨 나중에 입히고 했다. 이에 반발해 진성(秦成) 형은 그 급한 성격으로 「뗑깡」을 부리고 어머니를 원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백모님은 당신의 동서들에게도 잘했고, 조카들에게도 항상 부드럽고, 거두어 먹이려고 애를 쓰셨다.

예를 들면 우리 아버님을 비롯해서 밑으로 둘, 희주(禧周), 옥주(沃周) 삼촌들이 일찌감치 30대에 줄줄이 상처(喪妻)를 했다. 개중에는 젖먹이, 8개월짜리 아이도 있었다. 그 어린 것들을 후임 계모들이 들어올 때까지 모두 큰집에 데려다 끼고 자면서 암죽으로 키워냈다.

대표적으로 나의 여동생 경자(京子)가 출생 8개월 만에, 무정하게도 어머님이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키울 사람이 마땅치 않으니 큰어머님이 데려다 우리 계모가 오실 때까지 품고 키우셨다. 한참 모유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야 하는 동생들은 당시 분유 등 이유식이 없을 때라 동네에서 젖동냥을 해서 먹이거나 암죽으로 키워 나갔으니 위생 문제 등 계속 배탈이 나고 도대체 성장을 못했다. 

동생 돌날이 되어 큰댁을 방문했더니 경자가 큼직한 빨간 복주머니를 하나 차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기만 하고 도대체 일어서지를 못한다. 가엾고 불쌍해서 혼자서 얼마나 울었는지...

이런 아이를 줄줄이 백모님은 신명을 걸고 키워냈다. 5~6개월 후에 동생은 우리집에 돌아와 계모님의 보살핌을 받아 잘 성장해 지금은 72세의 할머니로 건강하게 수(壽)를 누리고 있다. 백모님의 헌신의 덕택이다. 

수고에 보답하느라 아버님이 서울 출장을 가셨을 때 중국산 밍크숄을 하나 사서 큰 어머님께 선물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가 1942년이다. 내 눈에도 대단히 비싼 물건으로 보였으며, 당시 부인에게는 그런 선물은 없고, 형수에게는 고가의 선물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예의의 표시가 아니라 형수에 대한 진정어린 존경의 표시로 나는 생각한다. 

에필로그

백부님은 백모님을 참으로 사랑하셨고, 소중한 평생의 동반자로 여기셨다. 고생을 하신다 싶으면 조부님과 상의해서 도시로 가끔 이주시켜 단출한 핵가족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첫 도시가 부산이었다. 초량에 집을 사서 약 2년간 사셨는데 동생, 아들들이 현해탄을 건널 때 반드시 지나는 길목을 택했다.

그렇다 해서 절대 일없이 도시생활을 즐기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사업과 연관을 지었다. 20~30톤의 범선이 고향 수어천을 출발해서 3일이면 부산 내항에 들어온다. 그 범선에 각종 양곡과 장작 그리고 김 등을 가득 싣고 와서 부산 거래처에 납품한다.

이 사업도 소규모지만 상당한 이윤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전보통신이 상당히 발달해 웬만한 거래는 모두 전보로 했다. 우체국에서 전보 전담팀이 있어 자전거로 신속하게 배달함으로써 국내 어떤 골짜기라도 3~4시간이면 전달되는 시대가 되었다.

대동아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모든 물자가 통제되면서 백부님은 다시 고향으로 철수했다. 고향에서 8.15해방을 맞이했고 본격적으로 사업계획을 세워 새로운 분야로 진출하기 위해 여러 가지 탐색을 했다. 그중 관심이 있었던 것은 ‘광양금광’이었다. 적산(敵産)인데 상당한 재투자가 필요한 분야였다. 그전에 광산으로 한번 다친 일이 있어 이것저것 재다가 사실상 포기하고 언젠가 다시 검토하기로 하고 접었다.

그리고 순천과 광주에 있는 인쇄소를 인수할 계획을 세우고 자금을 마련하기까지 해 놓았는데, 노조 문제에 대부분 좌익 계열이 접수하고 있어 안 되겠다 생각하고, 과거에 했던 유통쪽으로 다시 귀환했다.

그동안 2차 대전 막바지에 희주(禧周) 숙부가 평양에서 순천으로 전근을 오게 되었고 곧이어 해방을 맞이하면서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순천철도국에 남은 한국인으로서 최고위직 이었으므로 철도 행정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직원들의 투표로 철도대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미(美) 군정(軍政)이 시작되면서 자동적으로 철도국장으로 추인되었다. 따라서 백부님의 유통업에 큰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백부님은 끝줄의 동생들, 그리고 직계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동안 고향을 뜨기 어렵던 것은 고령이신 조부님 때문이었고, 망설이고 있었으나 셋째 할머니를 모셔 들이게 되어 그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농토는 더 이상 자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찍 간파했다. 북한에서 먼저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남한에서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토지개혁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업종을 바꿔 보겠다는 뜻이 있었다.

그때 마침 백부님의 노력으로 동생 옥주(沃周)를 5.10 선거에서 무난히 제헌의원으로 당선시켜 서울로 보내는 때가 왔다. 이에 맞춰 백부님은 서울 돈암동 종점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가족을 이사시켰다. 그리고 옛날에 하셨던 수집판매라는 전통적 유통업을 다시 시작하셨다.

일차적인 목표는 적당한 업종을 물색하기 위해 자본 축적에 주안점을 두었다. 자본 축적을 해나가면서, 아이들의 교육(막내 삼촌들과 백부님 직계인 사촌들 모두 6명이 그때 중학, 대학에 진학하고 있었다)에 주력하면서 서울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이때 일차 <프로젝트>로서 화물열차 다섯 칸에 미곡, 장작, 사료용 등겨 등을 가득 싣고 순천을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한 것이 1950년 6월 25일 오후였다. 6월 26일에 하역하기로 역(驛)과 협의가 된 상태였다. 그런데 6월 25일 오후 모든 철도물량이 군용으로 징발되는 바람에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25일 백부님과 진호(秦皓) 동생이 서울역에서 화물차를 확인했는데 다음날 오전에 들렀더니 화물차가 모두 사라지고 없어졌다고 한다. 상당한 손실이었으나 빚을 내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채(負債)를 지지는 아니하였다.

인민군 서울 점령기간에도 돈암동 가족은 모두 무사하였고, 1.4 후퇴 때는 철도국장 숙부 덕택으로 다른 가족들에 비해 아주 수월한 피난길에 오를 수 있었다. 1.4후퇴 당시 희주(禧周) 숙부는 부산 철도국장 관사를 쓰고 있었고, 백부님 내외를 모실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2월 21일은 조부님의 생신이었다. 장남인 백부님은 어디에 가 있어도 조부님 생신에는 꼭 참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효자 중의 효자였다. 이때 동생은 형님의 귀향을 극구 말렸다. 첫째, 피난민이 넘쳐나 배는 틀림없이 만원일 것이고 위험천만하다는 것을 예고했다. 둘째로, 고향의 백운산과 지리산은 빨치산 출몰로 치안이 극히 험악하니 절대 고향에 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숙부님은 견지했다. 숙부님의 그러한 주장은 백부님의 효심에 묻히고 말았다.

드디어 백부님의 고집대로 셋째 아들 진욱(秦旭)이와 함께 고향으로 향하던 부산~여수 간 연락선 창경호(昌景號)에 승선했고, 그 엄청난 피난민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다대포 앞바다 풍랑에 배는 침몰되고 말았다. 애석하고 땅이 뒤집힐 일이었다.

백부님의 서거로 우리집 가세는 그 신장(伸張)이 중단되었고, 정리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아 지금도 “큰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이런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등등 아쉬운 소리만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우리 가문으로서는 너무 큰 손실이었다.

그러나 백부님의 선견지명과 베푸신 은혜, 교육에의 전력투구는 결실을 맺어, 오늘날 이만큼 우리들이 펴 나가고 있으며, 이는 그분의 은덕으로 생각한다. 감사할 뿐이다.

백부님의 동생 사랑은 우리 아버님의 혼사에까지 이어진다. 백부님의 그 담력과 끈기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 외가편(外家編)에서 자세히 적으려 한다. 

끝으로 무례를 무릅쓰고 선대 조부님과 백부님의 성격과 부(富)에의 접근 방식에 관해 비교해 보고자 한다.

성격 비교에 좋은 대목이 논어에 있어 여기 적어 본다.

子路 曰 子行三軍則誰與, 子 曰 暴虎憑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謨而成者也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묻기를 “선생님께서 대군을 지휘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잡고, 맨몸으로 넓고 깊은 강을 건너려고 하면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과는 나는 함께 하지 않겠다. 반드시 큰일을 앞두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계획을 잘 세워 성취시키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 하셨다.

자로(子路)가 군사(軍事)에 관심을 갖고 그 방면으로 진출하는 고비에 마음먹고 했던 스승에 대한 질문은 위와 같은 공자의 대답으로 명쾌해 졌다.

조부님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기개가 대단하셨다. 이러한 활동성과 용기로 인해 짧은 시간 내에 일가의 부(富)를 이루는 기초를 마련하신 반면, 백부님은 그 치밀한 계획과 지묘를 발휘하여 일가의 중흥을 달성한 것을 보면 두 분은 퍽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반된 성격은 보완적인 힘을 발휘하여 2대에 걸친 가문의 틀을 공고히 하고, 후세인 우리들에게 은혜가 면면히 흐르도록 하셨다.

 
  백부님의 동생들 관리 (146회)
  창원 황씨(昌原 黃氏)와 비촌(飛村) (1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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