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풍(朔風) 속의 망명(亡命) (149회)
  제19장 나의 집안과 외가

나의 외조부 쌍괴당(雙槐堂) 종현(宗玹)은 1882년 비촌에서 출생, 한학을 하셨고 가친의 장손으로 집안일을 돌보시며, 부친이 외지에서 벼슬을 하시는 기간에 당신은 고향에 남아 가족을 잘 돌보셨다. 한학(漢學)이 출중하여 광양 향교의 초대(初代) 전교(典敎)를 역임하시고, 향교 재건과 대원군 때 폐허가 된 향토 사적을 다시 많이 일으켜 세웠다.

일제의 강점이 본격화되던 1910년 부친 병욱(炳郁)의 뜻을 따라 북간도 망명길에 오르시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투쟁에 혼신의 힘을 다 하시게 된다. 을사년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다 일찌감치 만주벌판에서 무장투쟁을 본격화 하시던 당숙 병학(炳學)과의 접촉이 자주 있었다. 
 
처음 북간도로 들어가실 때는 병욱(炳郁), 종현(宗鉉) 부자(父子)만 먼저 들어가셨다. 당시 경원선이 개설되기 전이라 경부선 열차로 신의주, 안동을 지나 최대한 열차가 닿는 데까지 가신 후 자동차, 마차 등 운송수단을 동원하여 연길에 도착했다.

연길 북방 약 60리, 연길시(市)에 가는 도중에 있는 동불사촌(東佛寺村) 아랫마을에 터전을 잡고, 집을 구하고 농토를 사들여 가족이 정착할 수 있도록 기반조성에 들어갔다. 정착금은 비촌에서 가지고 계시던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가져간 것이라 했다.

농사는 직접 지을 수가 없으니 손을 빌어야만 했다. 생계를 위해서는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었던 외증조부가 한약방(韓藥房)을 열어 운영하셨고, 의외로 성업이어서 후에는 그 지방 사람인 전문 한의사를 고용해 썼다고 한다. 어느 정도 기초가 잡히자 외증조모(태안 박씨, 진양 통영)가 먼저 올라가시고, 다음 해 외조모 그리고 8세 되던 호일(鎬一) 외숙 등 식솔들을 이끌고 본격적인 망명길에 올랐다.

가문의 원로들의 요청으로 장손인 외조부님만은 시제(時祭)에 꼭 참석한다는 조건으로 만주행을 동의했다는 말을 들었다. 따라서 고향에 떼어놓고 갔던 호성(鎬成) 외삼촌은 한참 뒤 일곱 살이 되어서야 그해의 시제를 끝낸 아버지를 따라 처음 만주에 들어가셨다 한다.

호성(鎬晟) 외삼촌의 증언에 의하면 비촌을 출발하여 하동을 거쳐 진외가가 있는 진양 땅(진양군과 통영 사이의 태안 박씨 집성촌)에 들러 이틀을 쉬고 진동고개를 넘어 어둑어둑할 때 마산에 도착했는데 항구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전깃불을 처음 보고 황홀감에 젖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부산에서 마산까지는 철도가 있어 기차를 탔다. 삼랑진에서 급행을 갈아타고 경성에 도착했다.

생전 처음 희한한 전차(電車)를 보고, 김 대감 댁에서 이틀간을 유숙하고 새로 개설된 경원선 열차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다. 다음날 기선으로 원산을 출발하여 나남(羅南)에 도착, 마차와 달구지, 자동차 등을 번갈아 얻어 타고 두만강 강변에 도착했다. 

공식적으로 국경을 넘을 처지가 아닌지라 적당한 곳에서 차에서 내려 강변을 따라 올라가다가 얕은 물을 택해 바지를 벗고 부자간에 허우적대며 강을 무사히 건넜다. 젖은 옷을 만주쪽 강둑에서 말려 입고, 걸어서 용정(龍井)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드디어 동불사 아랫마을로 도착할 수 있었다 한다. 대충 고향을 떠나 일주일이 걸리는 여행을 치러야 오고, 가고 할 수 있었다.

호성(鎬晟) 외삼촌의 만주의 첫 겨울은 참으로 가혹했다 한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이란 말이 실감나는 곳으로 폭설과 한파가 치기 시작하면 일주일은 밖에도 못 나가고 학교도 겨울에는 문을 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든 취사와 생활은 집안에서 이루어진다. 함경도 식의 부엌은 안방과 연결되어 있어 미닫이 하나를 열면 바로 외기를 접하지 않고 부엌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방한모를 쓰고 나가더라도 곧장 코와 입이 얼어붙어 따갑게 느껴지고 밖에서 소변을 보면 그 자리에서 얼음 촉이 이루어지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영하 30도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추위라고 했다. 연료로는 석탄, 장작, 토탄은 부유한 사람들의 땔감이고, 서민들은 주로 옥수수대, 밀대를 많이 쓴다고 했다.

호성(鎬晟) 외삼촌이 들어간 당시의 북간도는 「봉오동 전투」 그리고 곧 이은 「청산리 대첩」 등으로 매우 어수선할 때이다. 의병, 항일 애국청년과 신흥학교 출신들의 연합체 군단(軍團)은 망명 온 새터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일본 파견군과의 접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것이다. 
 
▲ 외가의 망명지 간도 백두산에 오른 뒤 연길에 와서 (2008. 8.)

이 대전투를 고비로 일군(日軍)의 세력이 매일 매일 증강되어 갔다. 곧 이은 만주사변 그리고 만주제국의 설립 등으로 항일 세력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일부는 시베리아로, 일부는 중국 중심부로 산개하기 시작했고, 이어 일본 본토의 개척민이 대거 들어오면서, 만주와 특히 북간도 지방에 있던 항일 애국 진영은 일반 생활인으로 변화했고, 노쇠해 가는 1세대가 세상을 떠나면서 별반 활동을 못하게 되었다.

위축된 애국진영은 일본 관헌의 줄기찬 감시 속에서 살아야만 했고,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와 싸우고, 빈곤이 중첩되어가는 처지에 배고픈 시대를 계속 살아야 하는 2중, 3중고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소통이 거의 없던 만주인들의 시선도 날이 갈수록 차가와지는 것이 견딜 수 없는 타향에서의 외로움이었다 한다.

우리 외가댁에서 겪은 한 예에서 얼마나 현지인과의 소통이 중요한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어느 날 나의 외조모께서 시아버님의 산소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실족해서 그만 다리 밑 개천으로 풍덩 빠졌다. 같이 갔던 하인 처녀가 개울로 내려가 냉큼 할머니를 끌어 올렸으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옷을 벗어서 짜 입을 수도 없고 난감한 순간인데 마침 이웃의 만주인 부호가 비서와 산책을 나왔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재빨리 비서를 보내어 자기집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어마어마한 부자인데 까만 벽돌담이 높이만 해도 3m가 되는 토성 같은 집이었던 모양이다. 여주인에게 도와주도록 당부하여, 여주인은 따뜻한 「가운」을 내놓고 하인으로 하여금 옷을 갈아입고 말리게 하며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 

두서너 시간을 같이한 가운데 손님이 한국인 망명객 가족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쌍방이 교양있는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두 집안은 그 후 아주 친밀해 졌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10여년 이상을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전혀 소통이 없었던 것은 우리 망명가족에게는 대단한 손실이었다. 숨어 산다는 것뿐이고 적과 우군을 분간 못하는 막힌 애국지사들이 많았다 하겠다. 

시일의 차이는 있지만 처음 북간도에 도착한 분은 두 어르신이었고, 1915년에 전 가족이 다 합류했다.

외증조부 炳郁 (병욱, 字 振文, 號 小雲, 1860~1924 卒 북간도에서)
외증조모 태안 박씨(晋陽人, 1858~1934 卒 비촌 서당집에서)
외조부 宗玹 (종현, 字 景海, 號 雙槐堂, 1882~1926 卒 북간도에서)
외조모 양천 허씨(1882~1944 卒 骨若面 언니댁 방문중, 葬禮는 黃竹里)
외숙 鎬一 (호일, 字 貫一, 號 棲雲, 1901~1983 卒 황죽리)
외숙 鎬晟 (호성, 일명 鐵柱, 字 貫佶, 1915~1988 卒 光州에서, 일본 중앙대 졸,
                 중고등학교교장 역임, 스승의 표상으로서 많은 훈,표창을 받음)
외숙 鎬畯 (호준, 字 福成, 1920~1941 卒 황죽리)
이모 允孝 (윤효, 1906~1939전주 李亨求에 출가)
모친 金孝 (금효, 1908~1941 卒)
이모 点孝 (점효, 1918~2008 졸, 보성 벌교 서씨 댁으로 출가)
 
위 열 분이 북간도에서 어려운 생활을 감내하셨으며, 큰 이모부는 수시로 전주와 간도를 내왕하셨다.

 
  창원 황씨(昌原 黃氏)와 비촌(飛村) (148회)
  외숙부의 청년시절 (1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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