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스스로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피지기해야 백전백승이라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먼저 이해하고 마음을 듣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그래야 어떤 상대라도 파악하고 상대할 자신과 에너지가 생기게 된다.
긴 세월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지인들과 제자들로부터 다양한 개인적 평가를 들어왔다. 그 중에는 마음에 흡족한 평판도 있었고 진짜 나를 보지 못했거나 비판적평가도 있었다. 타인들에 비친 나 장찬주에 대한 정의는 대략 세 가지다. 첫째 정과 의리가 깊다. 둘째 매사에 긍정적이다. 셋째 소 한 마리도 때려잡을 것 같은 덩치와 달리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에 대한 사람들의 모든 평가는 전적으로 틀리지도 옳지도 않다. 원래 인간이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다. 사람의 여러 단면 중 자기 마음에 드는 한 면, 어쩌면 그것이 장점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약점이나 단점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려면 주위 사람들에 비친 자기 모습을 한 번씩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
명지대에서 긴 세월 재직하는 동안 여러 부서에서 근무했다. 때로 나를 시기한 동료의 모함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또 체질적으로 아부나 공치사와는 맞지 않는 성격이라 적잖은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선배나 후배 그리고 동료들은 대부분 나를 성실하고 함께 일하기 편하고 동료로 인정해 주었다.
오랜 시간 곁에서 나를 지켜본 지인들은 너그럽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호의적인 평가를 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냥 무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과 절차가 무시될 때면 누구보다 분노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공사가 분명하고 철두철미한 성격 탓에 명지대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많은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 때문에 함께 일한 주위 사람들은 피곤했을 것이다. 가령 결제해야 할 서류에 오자나 탈자가 있으면 질색해서 부하 직원들은 매번 완벽한 서류를 만들어 올리느라 수고를 했다.
이런 나 자신의 완벽주의 성향을 잘 알기에 다른 사람들을 몰아치기 보다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분은 스스로 책임지려 항상 애를 썼다.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보다 스스로를 몰아치는 게 훨씬 마음 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료 직원들로부터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업무적인 면에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생활 면에서는 다소 숫기 없고 내성적인 편이다. 특히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아주 심한 편이라 한 번 거짓말과 변명으로 실망을 준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일부 사람들은 나를 두고 차갑다, 냉정하다는 말들도 한다. 물론 나 역시 사람을 모질게 대하는 것은 싫은 일이다. 그러나 믿음을 주었다가 배신을 당하는 일만은 정말 피하고 싶다.
나 역시 허점투성이의 인간이다. 하지 말아야 할 실수도 하고 큰 기대감을 가졌던 이에게 실망을 준 경우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정말 철저히 지킨 원칙 하나는 소중한 인연으로 맺은 사람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 원칙은 한결 같이 지켜가고 있다.
또 신뢰와 호감을 느낀 상대는 끝까지 마음 변치 않고 인연을 이어간다. 설령 상대가 실수를 하더라도 크게 나무라기보다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포용하려 노력해 왔다. 진실이 밑거름이 된 인연은 최선을 다해 지켜가는 것이 내 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냉정과 열정 그 중간 지대쯤에서 살아온 것 같다. 주어진 책임과 업무, 그리고 영화에 대해서는 용암처럼 뜨겁고 열정적으로,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다소 이성적이고 냉정한 부분도 있었던 거 같다.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자라온 환경과 내성적인 성격 탓에 아마 표현을 다 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미안할 따름이다. 가장 많이 사랑을 전하고 아껴줘야 할 이들에게 가장 감정표현이 서툴고 야박했던 탓이다. 생각 할수록 회한이 남는다. 사랑은 말로 직접 표현하는 것이지 상대에게 알아서 헤아려 달라 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단지 가족이란 이유로 꼭 해야 할 말들을 묻고 지나가는 실수를 범한다. 나 역시 평생 그런 실수를 되풀이 해왔다. 앞으로 내 인생에 남은 날들이 얼마나 될 지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냉정한 사람이라는 기억을 남기고 떠나고 싶지 않다. 따뜻한 아버지, 다정한 남편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지만 그동안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떠나는 그 순간까지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힘들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고 마음 허전할 때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는 그런 든든한 둥지의 존재로 기억되고 싶다면 욕심일까. 그렇지만 그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바램이다. 이 생에 주어진 시간이 다 하기 전에, 이 삶이 끝나 버리기 전에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