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의 보내는 하루는 남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무료한 하루를 홀로 견디다보니 사사로운 잡념도 늘어간다. 까맣게 잊고 있던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흘러간 지난 시간들이 마음의 빈 틈 사이를 파고들어 추억에 젖어들게 하기도 한다.
기운이 넘치던 한창 때는 퇴근 후 지인들과 어울리던 시간이 잦았다. 다들 없는 살림들이라 주머니는 가벼웠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실 되고 한결 같았다. 그 친구들과는 지금까지도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우정을 나누며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연들도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애초 좋은 마음으로 이어졌던 인연이 금전문제와 얽혀 얼굴을 붉히고 끝난 경우다.
이런 경우도 상대가 진실을 털어놓기까지 기다려 주었지만 끝까지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작정하고 거짓말 하는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현자(賢者)라도 이겨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나는 참 무른 사람이다. 일단 마음을 한 번 주면 완전히 믿어주는 성격이라 속이려 작정하면 나만큼 쉬운 바보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관계는 절대적 신의에서 비롯된다. 믿는 성격 탓에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상대의 말과 행동만을 믿고 실수를 한 적도 있었다.
살면서 가장 괴로운 일중 하나가 신뢰를 준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일이다. 그 때의 참담함과 상처는 시간으로도 회복 되지 않는다. 적의 칼에 찔리면, 적을 미워하고 적개심 속에서 보복할 기회를 노리며, 절치부심 와신상담 하지만, 믿었던 친구나 동료에게 비수를 맞으면 육체적 아픔은 물론, 절망감과 분노에 괴로워한다. 결국 화병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정신적 고통의 이면에는 신뢰를 주었다. 뒤통수를 맞은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무엇보다 크다.
명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과 UNICA한국협회장으로 일할 때도 이런 고초를 여러 번 겪었다. 혈기 넘치던 시절에는 욱하는 기질도 강했고 옳고 그름의 분명함을 쫓느라 정작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좋지 않은 감정을 오래 담아두지 않지만 한 번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 매운 면도 있다. 기운이 넘쳐 매사 자신감이 넘쳤으나 사람을 섬세하게 챙기지는 못했다. 정직하지 못하고 신의 없는 사람은 깨끗이 털어 내고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용서의 관대함은 부족한 편이었다.
나이가 들고 사람이 보이면서 나의 부족함에 대한 답도 보였다. 미운 이를 외면한다고 내 인생이 행복해 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움을 담아 둔 분노가 자신을 더 힘겹게 할 뿐이다. 진정한 자기수양은 자기 안의 미움과 화해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그 지혜를 깨달고 받아들이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좋은 점 하나는 주위를 돌아 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에 자신만만하던 시절에는 도무지 용납 안 되고 이해 불가능했던 일들에 타협의 여지도 생긴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존심을 포기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또한 나이가 주는 선물일 것이다.
귀한 깨달음을 얻은 만큼 마음에 생채기와 불쾌감만 남기고 끝난 과거 인연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희망도 생긴다. 내 스스로의 의지가 남아 있을 때 마딱찮은 감정들 모두 정리하고 싶다.
살다 보면 내 편도 생기고 적도 생겨나는 것이 인생사다. 진정한 삶의 연륜이란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미움으로 마음에 독을 쌓기보다 심중의 화(火)의 원인이 된 상대를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으로 성장해가는 일이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나 악연도 흐르는 세월 속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필연일 뿐 억지 인연이란 없다. 인연과 마찬가지로 악연조차 본인이 견디고 짊어지고 갈 몫이니 말이다. 물론 용서가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래는 변화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남아있는 날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잘 알기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떠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오래 동안 마음에 묵혀 두었던 분노와 언짢은 인연들과 기꺼이 화해의 악수를 청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자 한다. 상대를 위한 용서와 화해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마음의 묵은 짐 다 벗어 놓고 마지막 순간만은 아이처럼 가볍고 행복하게 떠날 수 있도록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