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부터 언론을 통해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는 기사를 자주 접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일본거류 대한민국 민단이 부산의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주일 한국 대사관에 제출해 논란을 가져왔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 만행으로 꽃다운 어린 나이에 펴보지도 못하고 인생을 파괴당한 어린 소녀들이 아직 일본 정부에게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황망한 일까지 생기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어이없고 분할 따름이다.
생각해 보니 나와 위안부 할머니들은 대부분 비슷한 연배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겪은 과거 고통의 시간들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나라가 힘이 없는 까닭에 누구보다 보호받으며 성장해야 할 어린소녀들의 미래가 너무도 무참히 짓밟히지 않았는가. 나라는 해방되었지만 그분들이 겪은 고통의 시간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이 못내 안타깝고 속상하다.
한국인들 중 우리 세대만큼 격동의 시대를 보낸 이들도 없을 것이다. 태어 나는 순간부터 고단하고 힘겨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나의 어린 시절은 조선인들을 상대로 한 일본인들의 경제수탈과 핍박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우리나라 말인 한글 말살정책으로 인해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은 성과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조차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눈과 귀, 입 모두를 가린 채 일본군국주의 지배세력들에게 끌려 다니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8월 15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일주일에 두 번은 학교운동장과 금곡천에 가서 자갈을 주운 뒤 낙화생을 심었고 한번은 군수물자로 쓰일 비행기 기름을 낸다고 오미봉 밑자락에 있는 공장까지에다 관솔을 따서 바쳐야 했다. 어린 아이들이 감당하기 너무 힘든 노동들이었다.
무엇보다 아이 때부터 귀에 익숙하게 불리던 어엿한 이름을 두고 창씨개명을 통한 일본 이름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낯설고 힘겨웠다. 당시 학교에서는 다들 내 이름을 부를 때 “마쓰바라(장)”로 혹은 “요시아끼(찬주)”라고 불렀다. 학교에서도 일본어를 배우고 친구들과 대화할 때조차 일본어를 사용해야만 했고 한국말은 아예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일본인 교장과 선생들은 전교생들에게 일본말의 일상적 사용을 강요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만약 실수로 한국말을 하는 학생이 적발되면 영락없이 그날 그 친구는 아이들 모두가 싫어하는 학교의 화장실 청소를 책임져야 했다.
끝없이 한국인들과 한국 문화를 억압하고 학대하던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치밀하고 강력한 무단(武斷)식민정책을 펼쳐갔다. 그런 살벌한 제국주의 통치 아래서 학교를 다녔지만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아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 배움을 주고자 하는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나의 담임 선생님은 박인재 선생님이셨는데 그 분은 내가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봐 주신 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정서상 사내아이들은 강하고 투박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는데 나는 희노애락에 민감해 자주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놀렸지만 선생님은 “찬주는 감수성이 남다르구나. 나중에 예술가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라고 오히려 장점으로 보며 격려해 주셨다.
바로 그 박인재 선생님께서 당시 나와 친구들에게 우리말을 잊지 않도록 곧은 가르침을 주셨다. 그때 내가 배운 교과서 중에 “조선어독본”이 있었는데 이 책에는 한문이 섞여 있어 자연히 한문을 익혀나갈 수 있었다. 5학년 때까지 이렇게나마 배운 덕분에 해방 후에도 한문이 섞인 신문이나 책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해방이 된 후 한글도 한문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해 일상생활을 해나가는데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어린 제자들을 위해 조선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이어갈 수 있도록 배움을 주신 박인재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모른다. 역사적 암흑기라도 올곧은 스승 한 분이라도 있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훌륭한 스승은 그 자체가 촛불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두 눈이 밝음을 마주 할 수 있도록, 어둠이 다할 때까지 스스로를 아낌없이 태워 빛을 밝히는 촛불과 다르지 않다. 바로 그 어둠을 밝히는 한 분의 스승 덕분에 나는 부끄러움 없는 사람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 덕분에 요즘의 젊은 세대를 보면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한글이나 우리나라 역사를 배워나가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음에도 자신의 모국어인 한글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문법의 파괴는 예사고 단어 자체의 뜻을 모르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유네스코는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이렇듯 우리의 한글은 세계가 인정한 문자다. 암흑의 일제 강점기에도 주시경 선생은 한글의 수호와 보급, 공용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 제자 이병기와 김윤경 등은 1926년 훈민정음 반포 8회갑을 맞아 ‘가갸날’을 제정했으며, 1927년 잡지 ‘한글’을 창간했다.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완성하여 국어 표준어 사정작업을 하여 한글의 공용화 대중적 보급에 힘썼다.
말은 곧 그 민족의 정신이기 때문에 선조들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한글을 잃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후손들은 그런 정신을 망각해 간다. 최근에는 공공기관에서도 조차 외국어를 남용한다. 운영되는 프로그램홍보 안내서에는 문화바우처니 크러스터, 장학컨설팅 등 같은 외래어 투성이라 어린이보호구역을 ‘스쿨존’으로 바꿨다. 우리말을 지켜가기 위해 노력해온 세대로서 정말 안타깝고 분한 일이다.
위안부 문제도 그렇다. 우리 민족은 단결해서 그 치욕과 상처의 역사를 기억해야만 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 일이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처럼 치부하고 넘어갔다. 일부 사회단체나 시민들만이 할머니들의 외로운 항거에 동참해 왔을 따름이다. 그러니 아직도 일본 정부와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있다. 우리 국민 전체가 그들에게 진정한 부끄러움을 가르쳐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외국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글로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데 단지 멋을 부리기 위해 영어나 외국어를 쓰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주시경 선생도 ‘문자가 없어 남의 나라 문자를 빌려 쓰는 민족은 영원히 문화 속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역사는 돌고 돌면서 늘 비슷한 양상이 반복된다. 문자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선변(善變)이 최선이다. 한자가 대세였다가 영어가 대세가 됐다. 다시 중국어가 대세인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는 세상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 시기를 앞당기는 책임은 한국인에게 있다. 일제시대에도 한글을 지켰다. 자기 나라 언어 하나 지켜낼 수 없는 민족이 어떻게 과거로부터 입은 피해의 역사를 당당하게 보상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언어적 자존심과 주권을 지킬 자격을 갖출 때, 진정한 역사적 승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본 정부를 향해 그들의 선조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저지른 역사적 범죄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요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