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캠퍼스의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 (22화)
  제4장 세상 속으로

1979년 7월 명지대학교 용인캠퍼스가 개교됨에 따라 대학 내 주요 본부를 용인캠퍼스로 옮기고 행정조직기구 또한 개편하였다. 1978년 9월부터 일부를 이전하기 시작해 거의 일 년을 걸쳐 대부분의 조직을 용인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학사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최춘환 학장보를 위시하여 각 행정업무의 과장들의 협의체로 운영을 맡게 되었다.

지금이야 용인이 많이 발전되었지만 용인 캠퍼스가 개교할 당시만 해도 그곳은 허허벌판의 산골이었다. 명색이 대학가 주변인데도 편의시설도 하나 없는 삭막한 곳이었다. 그런 곳으로 발령이 나자 주위에서는 한직이니 좌천이니 하는 말들이 나왔다. 하지만 속사정은 이랬다. 그 업무의 연장선에 처음 개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용인 캠퍼스를 서울 캠퍼스만큼 잘 관리하고 운영해줄 유능한 교직원들이 필요했고 그 모든 핵심적인 중책을 맡길 사람으로 내가 낙점된 것이다.

학교 업무 중 가장 업무량이 많고 처리할 일도 많은 곳이 바로 교무과이다. 학사 일정을 모두 총괄 관리하는 곳이기 때문에 교무과장은 학교운영의 실무자라고도 불린다. 이런 교무과의 제1교무과장으로 승진되어 용인으로 첫 출근을 해보니 눈앞이 막막했다. 불모지와 다를 것 없는 휑한 시골 산 중턱에 학교 건물 1동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학생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서울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학교까지 장장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 같이 차에 시달리며 오가느라 학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교통 문제는 나에게도 큰 어려움이었다. 같은 서울에서도 출근길이 녹록치 않았는데 경기도 용인이라니, 막막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명색이 승진을 했는데 어쩐지 승진 같지 않은 승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서운함 이면으로 다시 천성인 승부욕도 생겨났다.

‘그래 한직이든 승진이든 이곳을 서울 캠퍼스 못지않은 멋진 곳으로 바꿔 놓으리라’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다른 교직원들은 한동안 의기소침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들 마음 한구석에 서울 캠퍼스에서 밀려나 한직으로 쫓겨 내려왔다는 열등감이 적잖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교직원들에게 “명지대가 세계 속의 명문대로 성장하려면 제2캠퍼스인 용인 캠퍼스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발전해야 한다. 그 성장의 씨앗을 뿌릴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라고 다독여 나갔다. 그런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내가 생각해 낸 것이 ‘토요 휴강’이었다. 그때까지 모든 대학들은 주말인 토요일에도 강의가 있었다. 그런데 영동 방면으로 주말 나들이를 가는 여행객들 때문에 토요일이면 영동 고속도로의 정체가 극심했다. 새벽부터 통학버스 안에서 교통난에 시달릴 학생들을 위해 ‘토요일 강의 휴강’을 제안 했고 교수회에서도 승인을 해주었다. 덕분에 학생들은 주말에는 강의 대신 과제를 받아 집에서 공부하거나 서울 캠퍼스의 도서관을 이용하거나 서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학생들은 휴강으로 인해 토요일을 쉬게 되었지만 교직원들은 이전과 똑같이 출근을 했다. 서울 캠퍼스 직원들이 근무를 하는 상황에서 우리만 쉴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기보다 학교내외를 다니며 시설물 관리와 대학주변에 사는 주민들을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들을 펼쳐 나갔다. 이를 위해 학칙도 개정했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지 않고 좀 더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게 운영하기 위해 <명지대학 교직원토요봉사회>를 조직, 활동을 이어간 것이다.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학교 주변의 원주민들과 소통하고 화합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지금이야 학교 주변에 상가와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섰지만 그때는 대부분이 논이었다. 그래서 교직원 모두 힘을 모아 농사일을 거들었다. 봄이면 밭갈이와 모종 뿌리기, 모내기를 돕고 여름이면 김매기, 가을이면 추수를 도왔다. 농사일에 이골이 난 탓에 그 정도 일은 일도 아니었다. 직원 가운데는 시골 출신들도 있어 다들 싫은 내색 없이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었다.
 
▲ 교직원 토요봉사회원들과 함께 쓰레기 줍기를 하며 / 맨 오른쪽이 필자이다

학교 주변 환경 미화도 하고 마을행사에도 참여해 주민들과 어울리며 관계를 돈독히 쌓아갔다. 또 선한 사마이라 고아원 같은 불우한 처지의 이웃들을 찾아 선물을 전하기도 하고 성금과 위로를 하기도 했다. 특히 전국의 명승지들을 찾아다니며 교직원 간의 화합을 위한 시간을 마련했다. 이 모든 행사들이 모두 내가 결성한 ‘교직원 토요 봉사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나의 주도로 시행된 또 하나의 획기적 아이디어인 토요 휴강제도 빠르게 자리 잡아 나갔다. 특히 이 제도는 서울지역 대학들 중 지방 캠퍼스가 있는 여러 대학에서 곧 따라 시행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대학이 명지대학교처럼 수업일수를 수업주수로 바꾸어 학사운영을 하게 된 것이다.

또 그 당시 이화여대 등 몇몇 유명 사립대에서 대학 미졸업자, 기업체장,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원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사정이 있어 졸업을 하지 못했거나 직장인이나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커리큘럼들을 개발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었다. 명지대 역시 같은 시스템의 교육기관을 개설하고 운영했지만 평생교육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교육원과 사회교육대학원으로 명칭을 바꿔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나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사회교육대학원이라는 명칭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대학에서 사용되고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나와 교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용인캠퍼스는 하루가 다르게 자리를 잡아갔고 1983년 9월에는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다. 그 4년여 동안 교직원들은 내 집을 가꾸듯 교내 곳곳을 정성으로 가꾸며 돌봤고 내 자녀나 가족처럼 학생들을 위해 일했다. 그런 진심이 전해졌는지 학생들도 큰 문제 일으키는 법 없이 학사일정과 교칙을 잘 따라와 주었다.

이 시절 함께 일한 용인 캠퍼스의 교직원들은 내게 한 가족이자 전장의 동지와 같은 존재였다. 계속되는 격무와 힘든 출근길에 시달리면서도 그들 모두 명지대를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각오로 최선의 노력을 해주었다.

그런 그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해 ‘교직원 토요 봉사회’모임을 통해 수없이 많은 여행길을 함께 했다. 그런 시간을 통해 서로에게 더 깊은 동료애를 느끼기도 했다. 교무과원들과는 양양 낙산사, 재인 폭포, 목포 유달산, 청간정, 한라산 백록담, 내설악, 삼척 무릉계곡, 대천해수욕장, 설악산, 오봉산, 문경세재, 단양 도담삼봉과 사임암, 치악산, 등을 다녔다. 실로 가족들과 한 여행보다 함께 일하던 교직원들과 더 많은 여행을 다닌 것이다.

갖은 열정을 쏟아 명지대 용인 캠퍼스의 성장을 키워가던 나는 1992년 명지재단으로 발탁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거의 용인캠퍼스로 간지 15년 만이었다. 설립자 유상근 이사장의 별세 후 명지건설 사장으로 있던 장남 유영구 사장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선친의 영향인지 그 분도 나의 업무 능력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그래서 명지학원 산하 초, 중, 고 대학 그리고 관동대학 교직원들의 인사권과 자산관리를 모두 나에게 일임해 주었다.

이후 유영구 이사장을 도와 명지재단에서 모든 전권을 맡아 일하다 1997년 2월 정년퇴임을 맞았다. 하지만 지금도 명지학원 설립자 유상근 이사장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방목기념사업회의 위원으로 계속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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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학생회 간부들과 가족의 정(情)을 쌓다_1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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