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학생회 간부들과 가족의 정(情)을 쌓다_1 (23화)
  제4장 세상 속으로

내가 근무하는 37년간 서울문화사범대학부터 명지대학은 초창기에 비해 눈부신 성장속도를 보이며 발전했다. 그리고 이제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사립대학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대견하고 자랑스럽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그 아름다운 출발점에서 아름다운 씨앗을 뿌리고 가꿔 온 많은 이들 가운데 나도 있었다는 사실은 내 생의 긍지이자 자부심이기도 하다.

현재 명지대학교는 11개 단과대학과 9개의 대학원, 29개의 주요 산하기관 등이 있다. 시설과 규모 면에서 국내 어떤 대학교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또 전국의 우수 고등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장학 사업이나 각종 혜택들도 다양하다. 이 모든 노력들은 앞으로 명지대학교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으로 자리매김해나가기 위한 초석일 것이다.

명지대학에서 보낸 37년의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인연들과 만났고 그 분 모두에게 이생에서 차마 다 갚을 수 없을 정도의 은혜도 입었다. 특히 함께 고생하며 용인 캠퍼스를 만들어 나간 당시 교직원들에게는 이 글을 빌어 각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들의 헌신적인 애정과 사명감이 곧 오늘의 명지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추억 속의 그 모든 교직원들과 다시 한 번 모여 오래 전 여행지에서 명지대학의 발전을 논하며 끝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그 때의 순수한 열정의 밤으로 꼭 한 번 되돌아 가보고 싶다.

서울 캠퍼스에서 학생과장으로 일하는 동안 얻은 가장 특별한 자산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학생들을 언급한다. 그만큼 학생들과 나는 특별한 관계였다. 학생과장이라는 직책 상 하루에 수십 번 수많은 학생들과 만나야 하고 상담요청이나 필요로 하는 도움이 있으면 함께 머릴 맞대고 해결방안을 마련해주는 것이 나의 주 업무였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총학생회 간부들과 유독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부분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아이들인데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혼자 살다보니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었다. 또 자취생이 많아 제때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나 역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누구보다 힘들게 혼자 공부해왔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고독과 배고픔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또 동생 셋을 거느린 맏이이다 보니 손아래 아이들을 다독이며 건사하는 재주가 있었다.

특히 운동을 좋아하고 즐기는 성격 탓에 명지대학교의 모든 스포츠 동아리는 내가 주도해 만들었다. 1967년 농구부를 시작으로, 육상부, 권투부, 역도부를 만들었고 이듬 해 축구부, 태권도부, 탁구부까지 창단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테니스부까지 만들어 모든 운동부와 관련한 업무는 내가 근무하고 있던 학생과에서 전적으로 담당할 수 있도록 했다.
 
▲ 명지대 농구선수들과 (1978.)

창단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농구 열풍이 거세지 않았다. 하지만 1967년 한국 여자 농구의 전설로 남은 박신자 선수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한국 최초의 구기 종목 첫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의 쾌거를 거두자 농구종목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당대 아시아 최고 선수로 알려진 박신자 선수는 우리나라가 준우승을 했음에도 대회 MVP를 수상할 정도로 우수한 선수였다.

나도 이런 소식을 접하고 농구에 남다른 관심이 생겼다. 명지대학교에서도 박 선수 같이 나라의 명예를 빛낸 우수한 운동선수들을 양성해 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무엇보다 학교를 대표하는 운동부가 있으면 전교생들도 ‘하나’된 일체감을 키워나가는 데도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 같았다. 특히 농구는 남녀학생 누구라도 다 흥미를 가지는 운동이라 가장 먼저 농구부 창단을 서둘렀다.
 
▲ 명지대 농구선수들과 (1978.)

서울 캠퍼스에서 근무하던 시절 한국외국어대학 농구부를 인수하여 명지대 남녀농구부를 창단했다. 감독은 내가 맡고 코치는 명지대 초창기 농구선수로 활약한 정광은에게 맡겼다. 실업농구팀에서 선발한 농구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꾸려진 여자 농구부는 채현애 선수를 주장으로 선수단을 결성해 체코에서 열리는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 등 신체조건과 훈련 여건등이 유리한 서구 선수들과 맞붙어 준우승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렸다. 여자국가대표 농구팀의 영광을 재현한 것이다.
 
이외에도 명지대 농구부는 창단 이래 놀랄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1978년 춘계전국대학농구연맹에서 최강자 고대 농구부를 격파하고 처음으로 준우승을 차지해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역도부, 육상부, 복싱부 등 여러 종목의 운동부를 창단하였는데 축구부는 같은 해인 1978년 대학 연맹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육상부 역시 경인, 경춘역전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여 각각 대학부 우승을 하여 명지대학교는 스포츠 부문에서 명실상부한 명문대학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중에서 농구부의 실력은 일취월장 발전해갔다.

우수한 선수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둘 수 없어 해외 팀과의 친선 경기도 자주 마련했다. 1978년 호주 대학농구선발팀을 초청해 장충체육관에서 경기를 가졌고 이듬해인 1979년에는 미국 나사렛 대학 농구팀을 초청해 서울 남가좌동캠퍼스 체육관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운동부 선수들은 감독인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자신의 장래문제를 상의해 오고 선수로서의 슬럼프나 사적인 고민이 생겨도 숨김없이 털어놓고 상담을 청해오고는 했다.

 
  용인캠퍼스의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 (22화)
  총학생회 간부들과 가족의 정(情)을 쌓다_2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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