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학생회 간부들과 가족의 정(情)을 쌓다_2 (24화)
  제4장 세상 속으로

비단 운동부 학생들만 가까웠던 것이 아니다. 명지대학생들을 대표하는 총학생회 간부들과 누구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교무과장으로 재직할 당시 신규교수 채용은 내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그 과정에서도 실력보다는 재단 임원진들과의 친분이나 사적 관계가 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언제나 ‘학생들의 학업에 신임 교수가 장차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의 관점에서 평가를 내렸다.

한 번은 이런 경우도 있었다. 명지대는 기독교 재단이기 때문에 유상근 이사장은 모든 교수진들을 기독교인으로 채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1차 서류 심사를 하다 보니 학생들에게 여러 방면에서 도움이 될 만한 진정한 실력파 교수임에도 타종교를 가졌거나 무신론자라서 우리 학교의 채용조건에 맞지 않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몇 시간 동안 고민하다 그 교수와 면담을 가졌다.

“교수님의 이력서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기독교 재단이라 종교가 없는 분은 채용이 어렵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 양반은 실망과 충격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당사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 탈락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없어 채용되지 못한다는 내 말이 못내 억울했던 모양이다. 진한 실망감이 배인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종교는 믿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까운 교회나 친분이 있는 목사님이 계시면 찾아 가셔서 앞으로 다니겠다고 약속하시고 교인증명서를 받아 오시면 서류 접수를 하겠습니다.”

그 분은 그 길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결국 명지대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물론 누군가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나 역시 그 분이 기존에 다른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었다면 별 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신론자라 본인의 생각과 의지에 맞는다면 어떤 종교도 선택이 자유로운 입장이라 그런 권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행동 또한 모두 명지대 학생들을 위한 내 나름의 배려였다. 우수 대학으로 발전해 가려면 우수한 실력을 갖춘 교수진은 필수조건이었다. 그들을 통해 학생들은 더 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확장하며 우수 인재들로 성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 간부들은 이런 나의 숨겨진 노력을 알아주었다. 재단의 눈치를 보거나 인맥을 이용해 낙하산처럼 날아와 자리를 차지하려는 실력 없는 교수들을 차단하고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우수한 교수진을 기용하려는 마음과 노력임을 말이다.

지금은 20대 후반이라도 대학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모두 애띤 느낌이었는데 그 당시 학생회 간부들은 이름은 대학생이지만 분위기는 의젓한 사회인 같았다. 다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던 시절이라 일찍부터 철이 들고 심성이 단단해진 때문이리라. 그래서 마주 앉아 어떤 문제를 논의하거나 대화를 하다 보면 하나 같이 사유가 깊고 사리 분별이 분명했다. 특히 명지대학교에 대한 자긍심과 애교심이 참으로 대단했다.

총학생회 간부들 뿐 아니라 일반 학생들과도 수시로 대화하고 마음으로 성의껏 챙겨 주었다. 다른 교직원들처럼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행정 서류들과 씨름하기 보다는 운동장이나 체육관에서 선수들이나 학생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았고 어쩌다 짬이 나면 학생들과 가벼운 운동을 같이 하거나 사비로 간식을 사와 학생들을 위해 먹거리를 챙겨주며 바쁜 날들을 보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새 나도 모르게 대학 내에서 학생들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고 가깝게 대하는 가족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 제자들의 모임에 초청받아서

학생과장은 다른 부서 과장들보다 챙겨야 할 이들이 많은 자리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학사일정부터 각종 학생행사와 예산관리 집행 등 하루에도 처리해야 할 결제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총학생회와 관련된 일정들은 모두 내가 직접 챙겼다. 총학생회 간부 수련회와 학도 호국단 간부 임명식, 각 학과의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도 전부 나의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명지대학교 총학생회 간부들은 자신들이 학교학생들을 대표한다는 책임감이 남달랐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나 사회단체, 일손이 필요한 지역들을 찾아 다니며 봉사하기를 원했다. 나와 간부들은 협의를 거쳐 충북 영동, 충남 부여 등지의 오지로 농촌 봉사활동을 자주 다녔다. 특히 이런 곳으로 활동을 나갔다 돌아올 즈음이면 학생들과 주민들 사이에 그새 정이 들어 헤어질 때면 서로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봉사 활동에 대한 추억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그 중 여름날 흑산도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기억은 유독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활동 현장에 당시 문화공보부 강준형 사무관과 대한뉴스의 동석영 감독 및 정길봉 선생이 함께 동행해 뉴스 촬영을 진행했다. 여름이라 낮에는 땀 흘리며 섬주민들의 일손을 돕고 밤이면 부두 근처나 바닷가에 모여 밤새 노래와 이야기로 청춘의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이 현장들을 촬영한 영상은 전국의 극장에서 한 달간 상영되어 간부학생들이 몹시 즐거워하기도 했다.

또 정신 교육의 일환으로 학생회 간부들을 통일 교육원에 입소시키기도 했다. 모든 행사를 형이나 아버지의 마음으로 관장하고 집행하였는데 그런 나의 속내가 학생들에게도 전달이 되었는지 많은 학생들은 나를 단순히 ‘학생과장’으로 대하지 않고 동화 속 ‘키다리 아저씨’처럼 자신들의 곁에서 보살핌을 주는 가족 같은 친근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면 거리낌 없이 찾아와 상의하고 어려운 집안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아직도 그 당시 총학생회 회장들과는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 총학생회장 모임이 있는 날이면 초대를 받기도 한다. 지금은 그들도 모두 중년을 훌쩍 넘어 선 나이라 그 시절의 풋풋함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세월의 주름 너머로 지난날의 왕성한 혈기와 순수함이 엿보여 왠지 가슴이 뭉클할 때도 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기억 속에 항상 건장하고 자신감 넘치던 학생과장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내가 황혼의 노인이 되어 버린 사실이 못내 안타까운 모양이다.

“선생님이 아직도 이렇게 건강하게 곁에 계셔 주시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언제까지 오래 오래 사십시오.”

가끔 전 명지대총학생회 회장들의 모임에 초대받아 나가면 그 시절 제자들은 다들 이런 따뜻한 인삿말을 건넨다.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이 친구들은 가끔 식사 대접을 한다고 불러 주기도 하고 전화로 안부를 물어 오기도 한다. 다들 한창 사회생활에 정신없을 나이인데다 살아가자면 신경 쓸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텐데 지난날 스승인 나까지 돌아봐 주고 마음 써주니 고마운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

제자들의 건네는 따뜻한 그 인사말 한 마디에 내 지난 인생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마냥 행복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아, 그래도 잘 살아왔구나. 다른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는 이로운 삶을 살아왔구나’ 하는 안도감인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배고프고 힘겨웠던 시절, 총학생회 간부들과 나는 서로에게 특별한 추억이자 삶의 위안이 되며 고단한 시간들을 함께 극복해 왔다. 어느 덧 이제 함께 늙어가는 나이가 되고 보니 선생과 제자 사이를 떠나 때로는 같은 추억을 공유한 벗이자 가족처럼 허물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녹록치 않은 이 세상 버티고 살아내느라 많이 고생했을 제자들 모두가 남은 여생 가내 두루 평안하고 금슬지락(琴瑟之樂)하며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총학생회 간부들과 가족의 정(情)을 쌓다_1 (23화)
  한때 좌절했던 시간들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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