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를 채우지 않은 경북중고 재경36동창회장_1 (26화)
  제4장 세상 속으로

“어제 후배 신성일과 악수하고 왔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행길에 초당기념관에 들른 여성 방문객들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사람은 일단 얼굴부터 잘 생기고 볼일인 모양이다. 중년의 나이에도 꽃미남 남자 배우 이름 석자만 듣고도 어린 여중생처럼 저런 탄성을 내지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금이야 전국의 고등학교가 평준화 되었다지만 명문 고등학교의 빛나는 명성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내가 입학할 당시만 해도 경북고는 경상도지역 뿐 아니라 전국에서 알아주는 수재들이 모이는 명문 중의 명문고등학교였다.

평생 처지에 맞게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아오신 부모님께서 유일하게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장남인 나의 학업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경북고 진학에 대한 목표의식은 당사자인 나보다 오히려 선친이 더 강했다.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과 내 뒷바라지 때문에 희생하게 될 동생들에 대한 미안함에 선뜻 마음의 결정을 못하는 나와 달리 부모님의 의지는 확고했다.

일단 경북고 진학을 결정했지만 다른 아이들에 비해 정작 공부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일을 해야만 그나마 살림도 유지되니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다른 경쟁자 학생들은 가정교사까지 두고 학업에 열중할 시간에 나는 집안일을 도우며 학교와 집까지 12km의 통학길 위에서 공부를 해 나갔다.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열심히 연산 문제를 풀고 영어단어를 외우며 시험준비를 해 나간 것이다.

시험 전날, 장장 10시간이라는 거리를 죽을 고생을 하며 대구에 도착했을 때 정작 내 컨디션은 중요한 시험을 앞 둔 수험생이 아니라 내일 장례를 치러야할 만큼 심각한 환자의 상태였다. 어린 시절부터 정신적 스트레스와 피로가 극에 달하면 곧잘 학질에 걸렸는데 하필 그때 그 병에 걸린 것이다. 밤새 고열로 펄펄 끓는 내 곁에서 함께 온 아버지는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고 간호를 하셨다.

“곧 괜찮아질 테니 걱정 말거라. 날이 새면 씻은 듯 괜찮아 질 거다”

아픈 나를 위로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아버지 당신의 불안과 걱정을 잊기 위함인지 아버지는 불덩이 같은 내 이마에 연신 찬 수건을 갈아주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시험 당일에도 내 상태는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과 체념으로 밤새 까맣게 타들어간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차마 시험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야윈 아버지의 등에 업혀 시험장으로 들어간 나는 열에 들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겨우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가족들 때문이었다. 시험장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장남인 나 하나만 바라보고 고생을 견디는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합격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재들과의 전쟁과 다를 바 없는 치열한 경쟁인데 나는 최악의 컨디션으로 전투에 임한 것이다.
 
▲ 경북중고 동창회 모임에서

막연히 불합격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누구에게도 그런 속내를 털어 놓지 못한 채 우울한 1주일을 보냈다. 합격자 발표날 크게 실망할 가족들을 떠올리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발표장으로 향했는데 예상과 달리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 석자를 발견했다. 그 순간의 기쁨은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하지만 합격이 된 후에 정작 더 큰 고민과 걱정이 찾아왔다. 당장 등록금 마련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갈등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아버지께 우선 고등학교 진학보다 돈을 벌어 집안 살림을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런 걱정은 우리 몫이니 너는 아무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서 집안을 일으킬 생각만 하거라” 자식의 뜻에 항상 귀 기울여 주시던 아버님이 처음으로 내 말을 자르며 단호히 말씀하셨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등록마감이 다가오는데 돈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하루하루 까맣게 타들어가던 부모님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라 가슴이 아린다. 다행이 평생을 남에게 베풀며 선하게 살아오신 부모님에게 복이 돌아온 것인지 친척들이 나를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등록금을 마련해주신 것이다. 다들 뻔한 살림살이였음에도 그런 인심을 베풀어 줄 수 있었던 것은 평생 주위 사람들의 어려움을 나서서 도우며 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오신 부모님 덕분이었다.

친척들의 온정과 부모님의 뒷바라지 덕분에 겨우 명문 경북고등학교 학생이 될 수 있었던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열심히 생활했다. 하지만 가난은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수렁 같은 것이라 등록금 납부 기간이 될 때면 매번 공납금이 밀려 교무실로 불려가기 일수였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라 그때마다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 하지만 10대 시절의 가난은 분명 어린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일이었다. 얼마나 그 스트레스가 크면 악몽이나 가위에 눌려 잠이 깨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그 시절의 가난은 내 인생에서 평생 은인인 스승을 선물해 주었다. 바로 담임이자 지리과목을 담당하고 계신 이성학 선생이셨다. 등록금 납부 독촉해 시달리다 못해 통사정 하려고 교무실로 갔었는데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선생님은 그런 나를 한없이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더니 “집안 사정이 많이 어려운 모양이구나”하셨다.

울먹이며 사정을 설명하는 나를 선생님은 다독여 울음을 멈추게 한 후 다시 교실로 돌려보냈다. 그 날 이후 등록금 미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이 사라졌다. 알고 보니 선생님이 대신 내 등록금을 내주신 것이었다. 너무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워 혼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과 부모님이 보내주신 것을 모아 선생님께 돌려 드렸더니 오히려 선생님은 평소와 달리 화를 내셨다. “내가 돌려받을 생각으로 이 돈을 내주었을까”라며 끝내 거절하시는 선생님의 단호함에 밀려 결국 나는 그 돈을 갚지 못했다. 이 뿐 아니라 선생님은 방학 때 고향에 돌아갈 차비까지 마련해 주셨다.

이런 따뜻한 품성과 제자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리고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던 선생님께 배운 덕분에 나는 명지대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을 찾아내어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고향에 내려갈 때 차비나 용돈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 덕분에 이성학 선생님이 나를 비롯해 경북고 모든 친구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던 것처럼 나 역시 명지대 학생들에게 많은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선물 받을 수 있었다.

매번 등록금 낼 때가 되면 가슴앓이를 하고 이리저리 돈을 융통해 겨우 학비를 내가며 학교를 다녔지만 고등학교 시절은 내 인생에서 그 어떤 시간보다 찬란하게 빛나던 시간이었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당신이 아이비리그에 갈 수 있다면 인생의 성공은 할 수 없을지라도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친구로 가질 수 있게 된다’

 
  한때 좌절했던 시간들 (25화)
  임기를 채우지 않은 경북중고 재경36동창회장_2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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