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작은 미약하나 그 마지막은 창대하리라’ 성경 욥기의 이 귀절은 생각 할수록 인생의 진리이자 명언 같다. 청춘의 시작이 화려하고 거창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물론 부와 명예를 가진 부모 아래 태어난 인생은 그렇지 못한 인생보다 여러 면에서 삶의 여정이 훨씬 순탄할 수 있다. 하지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질 않던가. 제대로 겪어낸 고통은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가치 있는 영혼의 자산이 된다.
나 역시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교육행정직은 겉으로 보기보다 업무량이 막중하다. 일 년 사계절이 어떻게 오고 가는지도 모르게 책상 앞에 붙어 학사일정을 챙기고 필요 예산을 책정하고 집행하다 보면 어느 새, 봄. 시간의 흐름도 잊고 일에 매여 살다 잠시 숨 돌리면 어느 새 또 겨울이 코앞이었다. 그렇듯 등에 콩 볶듯 바삐 살아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늘 공허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지만 내 안의 열정을 쏟아 부을 진짜 대상이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던 차 불혹에 이르러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영화의 세계로 뛰어 들었다. 평소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기에 자연히 소형영화에 입문할 수 있었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상업이든 비상업 영화든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녹록치 않던 시절 나를 비롯한 아마추어 영화인들은 오로지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창작에 임했다.
누구도 그 열정의 가치를 알아봐 주지 않았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만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영화를 만드는 일이 좋아 한국 단편 영화의 성장과 도약만을 꿈꾸며 다들 열심히 작업을 매진해 온 덕에 오늘의 영광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나 한다.
나 또한 누군가의 권유로 영화를 시작했으면 아마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오직 나 자신의 의지와 애정으로 시작한 취미 활동이기에 어떤 일보다 진실과 열정으로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든가. 그런 진솔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영화연출 경력도 일천하고 경력도 짧았지만 첫 단편영화 ‘신록의 청춘’ 이후 평단의 호평과 상복도 이어졌다.
물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만 쏟아진 것은 아니다. 혹독한 비평도 따랐다. 내 작품이 기술적으로나 완성도가 지나치게 프로페셔널해 아마추어의 순수한 정신을 상실했다는 것이 비평의 주 내용이었다. 반면 그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다행이 높은 완성도가 한국 소형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고 새로운 방향과 활로를 제시한 작품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훨씬 우세한 편이었다.
나 역시 비평이든 호평이든 대중의 의견은 무엇이든 마음에 새기고 배워갈 각오였기에 평단의 반응에 일희일비 하지 않았다. 아마추어를 뛰어넘는 작품으로 인정받은 덕분에 1989년에는 KBS방송국 ‘영상시대-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프로에 1년 간 고정 패널로 출연도 했다.
당시 유현목 감독, 이장호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동국대 민병록 교수 등 당대의 내노라 하는 영화계의 거장들과 함께 소형영화에 입문하는 초보자나 아마추어 시청자들이 출품한 작품을 전문가의 입장에서 평가해 주던 프로그램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아마추어 영화계 뿐 아니라 장편영화계 쪽에도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1977년에는 처음으로 드라마촬영도 시도했다. 내가 소형영화에 입문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소형영화 인구는 대략 500명 정도였다. 이 중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만든다 해도 시나리오나 배우들의 연기 등, 전체적인 작품의 수준이 함량 미달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진정한 실력을 갖춘 영화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영화문법과 드라마 작업등을 공부하며 시나리오 작업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
비록 아마추어 배우들이지만 배역 선정 역시 수차례의 테스트를 거쳐 자질과 열정을 갖춘 학생들로 까다롭게 선택했다. 내실 있게 기본기를 다진 후 ‘소망’ ‘여창’ ‘봄의 행락’ 등의 초기 세미다큐멘터리가 탄생되었다.
이후 소형영화계에 입문한지 만 3년이 채 안되던 1978년 12월 6일 서울신문사 3층 강당에서 첫 개인작품 발표회를 열게 되었다. 그때까지 평론가들과 영화인들에게만 평가받던 작품을 처음으로 영화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날이었다. 기대와 두려움의 감정 속에서 전날 밤 한숨도 못 이루고 발표회장에 도착한 나를 반겨준 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관객들이었다.
그 날 모두 세 작품이 상영 되었는데 첫 번째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세계적 규모의 제 42회 세계사격 선수권대회를 배경으로 한 ‘한국 속의 세계’이었고 두 번째는 우리의 얼을 찾는 시리즈물 1편으로 ‘돌다리’라는 작품이었다. 두 작품 모두 일반 대중들이 흔히 접할 수 없는 주제로서 운좋게 나의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같은 해 열린 제7회 한국소형영화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겨주기도 했다.
그 날 마지막 상영작은 46분물인 드라마 ‘파도’였다. 그 작품이 상영되는 내내 관객석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조용했다. 그 침묵이 감독에 대한 실망인지 작품에 대한 집중 때문인지 잔뜩 긴장한 상태의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 불이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비로소 정적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내 귀를 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영 내내 이런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관객들은 나와 내 작품에 열렬한 갈채를 보내 주었다.
영화를 하기 위해 혼자 무던히 노력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가슴이 한없이 벅차 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꿈꾸고 동경하던 영화가 마침내 내 인생 안으로 들어 온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국 단편영화계의 살림꾼이자 대부라 불리던 나의 본격적인 영화 인생 1막이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