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서울 국제아마추어소형영화제의 큰 성공은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상업영화 쪽에서도 ‘장찬주’가 이끈 영화제 성공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한국 아마추어 영화인들에게 제 2의 성장과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더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국제영화제 성공이후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나를 회장으로 연임시켰다. 한 번의 기적을 일궈낸 회원들은 자신감이 넘쳐났고 더욱 열의와 의욕을 가지고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두 번째 임기 중 또 한 번 서울국제아마추어영화제를 열 기회를 얻었다. 이미 경험이 있으니 회장인 나나 회원들 모두 자신감이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돈’이었다.
문공부의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대규모 문화 예술행사인 만큼 국내의 유명 인사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참여의사가 절실했다. 운영진들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예술적 지성과 재력을 갖춘 인사들을 물색했지만 모든 것을 갖춘 팔방미인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밤잠을 못 이루고 며칠을 고심하던 차에 어느 날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가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 불리는 ‘김지미’ 배우였다. 이미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남자 못지않은 그이의 호방하고 당당한 성격에 대해 잘 알려져 있던 터였다.
나도 결심이 서면 주저가 없는 성격인 만큼 무작정 약속을 정하고 찾아갔다. 만나 보니 정말 풍문의 주인공다운 여인이었다. 어지간한 사내대장부의 배포보다 더 크고 대범한, 진정한 여걸이었다. 무엇보다 그이는 장편이든 단편이든 한국 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역할도 마다 않는 사람이었다. 유현목 감독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며 긴 말도 없이 흔쾌히 ‘오케이’해주었다. 그렇게 김지미씨가 대회장직을 맡아주면서 모든 진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1회 때와 비교해 영화제기간 단축과 경선을 통해 진행하다보니 참가국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일본을 비롯해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모로코, 이란, 스위스, 유고 슬라비아, 미국 등 세계 13개국에서 총76편이 넘는 역대 가장 많은 출품작들이 신청을 해왔다. 다른 해보다 드라마 장르가 가장 많았고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시네포엠 순으로 접수가 이뤄졌다. 내가 단편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단편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다양한 직업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단편영화 감독은 생계를 위한 본업들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만은 포기할 수 없어 개인 시간을 내어가며 영화작업에 매달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 영원한 청춘들의 도전이자 희망’이라고 부른다. 젊음이 무엇인가. 미래에 대해, 불가능한 것에 대해, 가 닿지 않는 곳에 대해 영원히 꿈꾸고 동경할 수 있는 권리이다. 사람은 꿈꾸기를 포기했을 때 늙어버리는 것이다. 청춘은 그래서 육체적 나이가 아니라 마음의 나이라 할 수 있다.
단편영화 감독들의 직업들은 각양각색이다. 평범한 회사원에서부터 학생, 엔지니어, 교육자, 영화종사자, 판사, 농부, 자영업자, 공무원, 의사, 화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영화라는 공동의 매개체 안에서 같은 꿈을 가진 동료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제1회 국제영화제의 성공적 경험 덕분에 제2회 서울국제아마추어 소형영화제는 유래 없는 성공과 함께 우리나라는 9개의 입선작 중 세 작품 수상이라는 최고의 결실을 맺으며 막을 내렸다. 페회식 날 김지미 대회장이 “어려운 여건 아래서 국제 영화제를 이만큼 성공적으로 치뤄낸 장찬주 협회장의 노고에 특히 감사한다”며 모든 공로를 내게 돌리며 따뜻한 말로 치하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협회 회장과 운영진 모두 두 번의 국제영화제가 모두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회장인 나의 노력과 수고 덕분이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진심이 담긴 위로의 말에 그동안 내색하지 못했던 답답한 속내가 한 순간 풀리며 모든 피로가 씻어 내려가는 듯 했다.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사실 힘든 일이 적지 않았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다 하던가. 협회의 규모가 커지고 발전할수록 나를 견제하는 세력도 늘어나고 사사건건 회장인 나의 계획에 각을 세우며 반대하거나 뒤에서 음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곤란을 겪을 때마다 처음 협회장직을 맡아 수많은 회원들 앞에서 첫 총회 개회사를 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전 세계 아마추어 영화인과의 작품 교류를 통해 국제 친선을 도모하고 우수한 해외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 감상하는 기회를 갖게 됨으로써 우리나라 아마추어 영화계가 자극을 받아 영화의 질적 향상과 양적 수확을 얻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개인적인 부귀영화나 명예를 기대했다면 차라리 다른 일에 나의 열정과 시간을 쏟았어야 수지타산이 더 맞았을 것이다.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 회장직은 내게는 봉사직과 다름없었다. 평생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던 단편영화의 발전과 같은 길을 가는 영화인들과 후배들에게 앞길을 편히 열어주고 싶은 마음에 머슴의 심정으로 부지런히 일해 왔다. 한순간도 직책에 연연한 적 않고 모든 일은 내 능력치 이상으로 열과 성을 다했다. 다양한 행사와 해외원정 활영, 대회 추진 등을 통해 회원들에게 성장의 기회를 마련하였고 부족한 예산 탓에 자비를 들여가며 세계 여러 국제영화제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우리나라 소형영화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애초부터 어떤 대가나 공치사를 바라고 한 일들은 아니었다. 내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영화인의 길이었고 걸어 온 그 행보에 어떤 후회나 아쉬움은 없다. 다만 개인적 사심과 욕심 없이 단편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으로 하얗게 불태워 온 나의 지난 생이 거짓된 치장이나 지나친 평가절하도 없이 훗날 진실 그대로 공정하고 올바르게 평가받기를 바랄 뿐이다. 무엇보다 지난 세월 애써온 모든 시간들 덕분에 우리나라가 세계UNICA 회원국으로 가입할 수 있는 자격과 영예를 얻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그동안 서울국제아마추어영화제는 서울세계단편영화제로 명칭이 바뀌어 세계적 권위를 가진 단편영화제로 매년 성장을 거듭해 가고 있다. 특히 UNICA세계영화제에 출품할 우리나라의 대표작품이 바로 서울세계단편영화제를 통해 선정되기 때문에 한국 단편영화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국제아마추어영화제 개최 이후 UNICA한국영상예술협회가 발족되고 회장직을 맡아 오랜 시간 우리 단체를 이끌고 오느라 사실 단편영화계까지 챙겨 볼 여력이 없었다.
UNICA한국영상예술협회 회장직을 물러나면서 차기 회장과 운영진에게 지난 행사와 대회준비를 하면서 정리해둔 다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으니 언제든 도움이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협조의사를 밝혔다. 차기 운영진들이 다들 능력 있는 분들이라 서울 단편영화제도 착실히 성장해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영화제로 인정받고 있으니 같은 영화인의 한사람으로서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이제 현역을 떠나 단편영화를 사랑하는 평범한 한 사람의 관객으로 돌아온 지금, 앞으로도 항상 한국의 단편영화인 모두를 응원하며 그들의 행보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