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생을 만들어 준 은인들_2...

UNICA본부는 독일 협회장의 사망소식을 각 나라 회원국들에게 알리고 진심어린 애도를 표했다. 독일과 가까운 나라 대표들은 직접 장례식을 찾아 조문을 하기도 했다. 마음만은 직접 찾아가 스템플회장의 마지막 가는 길,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너무 먼 거리인데다 건강상의 문제로 길을 나설 수 가 없었다. 대신 한국에서 그 분의 편안한 영면을 간절히 기원했다.

가장 어려웠던 초창기 시절 그 분은 UNICA 선배 회원국으로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고 우리 협회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무엇보다 열린 마음과 순수한 열정의 삶을 통해 수많은 후배 영화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다. 비록 생은 끝났지만 독일 비상업 영화는 그 분의 헌신을 밑거름으로 변함없이 성장해 나갈 것이다.

마지막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은 은인은 이춘선 UNICA한국 부회장이다. 이 분과 나는 뒤늦게야 영화를 시작한 늦깎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사적으로도 친구처럼 지냈다. 구청의 문화강좌에서 단편영화를 배우다 더 욕심이 생겨 우리 협회까지 찾아온 이 부회장은 우리 협회 모든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오랜 시간을 봐왔지만 단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밝은 분이다. 그 따뜻하고 좋은 미소와 기운이 주위 사람들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 벨기에서 열린 UNICA 대회에서 UNICA기를 인수하고 있는 필자

협회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거나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을 때는 항상 먼저 나서서 궂은 일 힘든 일을 척척 해결해 나가곤 했다. 그러니 자연히 다른 회원들도 존경의 마음으로 따르게 되었다.

영화인으로서의 추구하는 목표와 열정도 남달라 본인이 주도로 결성한 지회도 세 개나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모임도 건사해 나가기 어려워하는 마당에 세 지회 중 어느 한 군데에도 뒤처짐 없이 알차고 체계적으로 운영해 나가 영화를 공부하는 젊은 후배 회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부회장의 입장에서 회장인 나를 물심양면으로 보좌해 주었으며 많은 업무에 밀려 미처 챙기지 못한 사안들이 있으면 본인이 잘 정리해 두었다가 순차적으로 해법을 찾아 나갈 수 있도록 조언해 주기도 했다. 이처럼 안살림을 잘 해주는 부회장 덕분에 나는 대내외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고 UNICA 한국 협회도 빠르게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이 세 분의 한결같은 신뢰와 지지 덕분에 크고 작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회장으로서의 맡은 바 책임과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볼모지와 다름없던 소형영화작가 협회와 UNICA 한국 협회가 오늘 같은 눈부신 성장의 디딤돌을 마련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세분뿐 아니라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수많은 분들이 회장인 나와 우리 협회를 조용히 밀어주고 한결 같은 신뢰를 보내 주었기에 오늘 같은 ‘세계 속의 한국영화’라는 영광의 날이 올 수 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실 젊은 시절의 나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내였다. 항상 먹고 사는데 바빴고 특출한 재능이나 화려한 배경 같은 것은 가져 본 적 조차 없었다. 가진 것은 건강한 몸과 마음 그리고 어떤 일에든 실증내지 않고 마지막까지 초심과 뚝심으로 해내는 성실함과 근성뿐이었다. 그런 내가 영화를 만나 첫사랑을 앓듯 무섭게 빠져 들었다.

지금이야 영화를 한다고 해도 뜯어 말리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내가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돈도 안 되는 헛짓’에 귀한 시간을 낭비한다고 손가락질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젊은 청춘도 아니고 중년의 나이에 시작한 영화로 이 정도의 영예와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항상 가르치지 않되 몸소 솔선수범하는 언행으로 내 인생을 이끌어 준 세분의 보살핌과 사랑 덕분’이었다.

가슴 아픈 것은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을 채 갚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어 송구하고 한탄스러울 뿐 이다. 살아 있을 때 마음을 다해 감사의 뜻을 전하긴 했지만 그것이 베풀어 준 정에 대한 보은이 될 수 있었겠는가. 그 분들께 미처 다 되돌려 드리지 못한 보답의 마음은 죽는 날까지 우리 영화에 무엇으로든 보탬이 되는 길을 찾아 보답하려 한다. 초당기념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마음의 발로다.

▲ 한국에서 열린 UNICA 대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좋은 스승들 덕분에 나 역시 누군가의 인생에서 최고의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는 가르침을 얻었다. 정답을 알려 주는 것은 진정한 스승이자 좋은 교육이 될 수 없다.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어딘가에 있음을 일깨워 스스로 찾아가게 하는 것이 인생의 참 조력자이자 믿음을 주는 길잡이가 해야 할 역할이다. 나도 그렇게 배웠고 혼자 힘으로 나의 길을 찾아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영화계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오롯이 그런 마음자세로 가르쳐 왔고 그런 내 지도 방침이 옳았다고 자부한다.

이제 머지않은 시간에 지난 나의 노력과 헌신을 평가받을 날들이 올 것이다. 지난 시간 내 인생에는 참으로 좋은 스승들이 많았고 그 스승들을 통해 습득하고 체득해 온 올곧은 정신과 지식을 나 역시 제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전해 왔다. 스스로 ‘가진 모든 것을 힘껏 써서 배움을 익혔다’고 자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주변에서 ‘옳다’ ‘그르다’ 또는 ‘맞다’ ‘아니다’로 평가를 내리는 것에 큰 의의를 두지 않는다.

이 생에서 다시 만날 수 없을 학식과 인품 깊은 스승들의 가르침 덕분에 정도를 걸어왔고 또한 내 그릇에는 벅찬 스승의 자리에서도 내가 가진 최고의 지식과 지혜의 자양분들을 아낌없이 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니 그것으로 내 몫의 후학에 대한 도리는 다 한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앞으로 이 땅에서 자기 인생을 영화에 걸어 볼 각오가 된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인생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는 길이다. 다만 그 길을 찾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스승을 찾아내 그 가르침에 순수하게 순응하며 따라야 한다. 그런 후 자기 앞에 놓인 길은 오롯이 혼자 걸어가야 한다. 좋은 스승으로 부터 물려받은 지식과 지혜를 총 동원하여 가장 자신다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곧음과 자신감으로 사람들의 삶에 잠시나마 기쁨과 감동을 주는 진실 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흉내 내는 영화인이 아니라 진실된 자기 목소리와 이야기 그리고 삶을 담아내는 진짜 영화인이 많이 탄생할 수 있기를 한 사람의 선배로서 오늘도 조용히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