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2016년 11월20일 한국영상작가협회에서는 올림픽 공원에서 가을 촬영회를 가졌다. 협회회장을 역임했기에 매년 아무리 일이 바빠도 이 행사만은 빠지지 않고 참여하려 애쓰고 있다. 그 날도 아침 일찍 서둘러 올라와 보니 생각보다 많은 회원들이 대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창 전국으로 촬영을 다닐 때 늘 함께 다니던 단짝 멤버 최인범 명지대 전 사무처장과 남재 선생, 이풍우 고문, 영상작가협회 금종옥 회장과 임원진 등도 참석해 촬영회를 빛내 주었다.
은퇴는 했지만 이런 행사날이 되면 마음은 오히려 처음 영화를 시작하던 때로 자연스럽게 거슬러 올라간다. 맨 처음 영사기를 손에 잡게 된 계기는 1975년 명지대학교 학생과장 시절 축제를 주관하다 기록영화를 찍게 되면서 부터였다. 당시 유용근 재단 이사와 축제 준비에 대해 이런저런 상의를 하던 중 그 분이 “우리 학교의 각종 행사를 영상으로 한 번 남겨 볼 수 없겠나”하고 물었다. 그때는 대부분의 기록들이 사진과 인쇄물에 의존할 때라 일반인들에게 영상 기록물 작업은 생소한 분야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없는 용돈을 쪼개가며 좋아하던 영화를 봐야 직성이 풀리던 지독한 영화광이었던 나는 그 말에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며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내가 유 이사의 의견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자 유 이사는 자신이 속해있는 라이언스 클럽 사무국장인 김종욱 씨를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나의 남은 인생을 한국 단편영화와 비상업 영화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 준 계기가 되어 주었다.
축전 행사를 영상물로 기록하기 위해 캠퍼스와 학교 주변을 바삐 촬영하는 김종욱 씨를 매일 같이 좆아 다니는 동안 오랜 세월 마음속에 간직해 온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김종욱 씨도 나와의 많은 대화를 통해 내 마음을 알게 되었고 소형영화를 베워보라고 권유해 주었다. 축전 행사 기록을 끝내며 그는 꿈을 이루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사용하던 영사기와 카메라를 선물로 주었다. 그 뿐 아니라 한국 소형영화 동호회(현 한국영상작가회)까지 소개해 주었다.
이처럼 사람이 꿈을 이루기 위한 시작점에는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이들이 꼭 한 두 명은 있기 마련이다. 사실 소형영화협회 회원들 가운데는 중장년층들이 적지 않았다. 나처럼 젊은 시절부터 영화를 사랑하며 언젠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를 꿈꾸다 뒤늦게나마 취미로 영화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가정이다 직장이다 늘 쫓기듯 살면서도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 대견하고 자랑스럽기 한량없다.
처음 소형영화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협회회원들은 대부분 직장인이었다. 직장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한 번도 강의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영화이론을 배우고 영화의 기초테크닉들을 배워가는 회원들의 얼굴은 피곤은 커녕 한창 재미난 놀이를 발견한 아이처럼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아마 그들 눈에는 나 역시 마냥 즐거워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남들보다 더 의욕이 넘쳤던 탓에 다른 회원들이 쉬는 주말에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촬영을 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니 피로가 쌓여만 갔다. 그래도 힘들거나 지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주중에는 학교 업무를 매달리고 남는 자투리 시간에 영화 전문잡지를 보며 부족한 실기 기술을 공부하고 시나리오 구성, 연출이론, 활영기법 등의 영화의 기초와 이론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 나갔다.
그렇게 공부를 하니 확실히 점점 더 작품의 질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소형영화는 말 그대로 아마추어들의 작업인 만큼 디테일이나 기법 면에서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또 소재 역시 일상적이고 단순한 편이다. 그럼에도 회원들은 매 순간 온 정성을 기울여 촬영에 임한다.
그 순간만큼은 한국 영화계의 거장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의 집중력에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처음 영화를 배우던 초보 시절에는 나 역시 전국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유명 사찰, 고향의 풍경 등을 찾아다니며 촬영했지만 작품을 찍으면 찍을수록 더 좋은 작품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이것 보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들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공부를 어떤 방식으로 더 해나가야 할까’
그 당시 내 마음 속에 이런 질문이 자리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욕심은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 상업영화계로 진출해 보겠다거나 유명해져 보겠다는 사심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단지 영화를 만드는 일이 너무 재미있고 한 컷 한 컷 심혈을 기울여 찍은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는 그 어떤 일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희열과 행복을 느꼈다. 그 충만한 즐거움은 내 인생과 일상에 기대 이상의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했다.
지난 가을 촬영회에 참가 한 것도 오래 전 그 시절에 느꼈던 행복과 열정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금종옥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들, 주연 남녀 배우 모두 중년을 훌쩍 넘긴 사람들이었다. 보통 그 나이 여성들은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커피나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남자들은 사우나나 등산을 다니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회원들은 불혹이 훌쩍 넘는 나이인데도 무거운 카메라를 챙겨들고 아침 일찍 부터 촬영회에 참가해 몇 시간에 걸쳐 영화를 찍으며 행복해 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 아마추어 영화인들이다보니 테크닉이나 촬영 기술, 현장 지식 등은 여러 모로 부족하다. 하지만 한 컷 한 컷 완성시켜가는 열정만큼은 세상 어떤 영화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내 눈에는 그렇게 노력하는 회원들 모두의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이런 열정의 인생이야 말로 정말 괜찮은 인생이 아닐까.
나는 그날 촬영을 하지 못했지만 후배와 제자 회원 분들을 지켜보고 디테일한 부분만 지도해 주었다. 그 정도만 참여했을 뿐인데도 하루가 너무나 가슴 뿌듯하고 즐거웠다. 마치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 그때 그 시절의 자신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인생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일을 시작하던 첫 순간의 다짐과 열정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한 이들은 입버릇처럼‘초심을 잃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만큼 간사한 것은 없어서 경제적 여유와 육체적 편안함이 찾아오면 자신도 모르게 열정과 성실함은 녹이 슬고 나태하고 교만함이 싹트기 마련이다. 인생의 위기는 바로 이런 순간에 찾아온다.
다행이 영악하지 못한 나는 기대 이상의 성공이 찾아 왔을 때도 자만하지 않았다. 아니 자만할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부족함과 단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채워가야 할 부분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겸허함 덕분에 그동안 별다른 어려움 없는 순탄한 영화 인생을 걸어 올 수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