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는 어디에서 읽은 글귀처럼 ‘머리는 유럽, 가슴은 아시아, 몸은 아프리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나라이었다. 삶의 방식이나 사람들의 가치관, 도시의 모습은 유럽을 많이 닮아 있지만 건축물을 비롯해, 도시 전체에서 풍기는 느낌은 이슬람 문화의 잔향이 느껴지는 중동이었다. 또 지리적으로는 아프리카 대륙 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신비함이 느껴지는 극과 극의 반전 이미지 때문에 일 년 내내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그래서 관광수입은 많지만 기간산업이 낙후되고 우수한 인재들도 부족하다 보니 항상 무역수지 적자에 시달리는 나라다. 국제영화제를 개최한 것도 유럽 쪽 대표들이 세계 정·재계 쪽으로 인맥이 넓은 유력인사들이 많다 보니 그들을 대상으로 자국의 관광자원을 홍보하려는 것이 주목적인 듯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튀니지 국제영화제는 초대받은 사람 입장에서 너무나 즐겁고 만족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참가국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수준이 높았고 각 나라 영화인들과의 만남도 유익하고 즐거웠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 영화인들을 만나는 것은 항상 가슴 설레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특히 이 영화제에서 나는 유일한 아시아권 나라에서 참석한 대표로 소개되어 각국 대표들과 관객들에게 엄청난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환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전 해인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국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일반 관객들이 더 따뜻한 환대를 보내준 것이다. 튀니지 국제영화제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자국 내에 약 200여개의 아마추어 영화단체 지부가 있어 아마추어 영화인들이 상업 영화인들 못지않은 다양한 활동들을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부의 이런 지원 덕분에 소형영화 이론을 바탕으로 한 우수 연구와 발표들은 많은데 정작 촬영에 필요한 기자재들이 부족해 현장의 작품제작 상황은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 튀니지 소형영화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었다. 개인용 기자재는 가지지 못하고 각 단체에서 소유하고 있는 기자재로 작품을 제작하다 보니 창의적인 연구와 실험적 작품 제작에 도전하는 일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리나라 영화인들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8일의 일정동안 열린 튀니지 영화제에서 나는 수상의 영광은 안지 못했지만 그 영화제를 기회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영화인들을 사귈 수 있었다. 특히 벨지움 대표 로버트 마링루 씨와도 그곳에서 처음 만나 그의 초청으로 1990년 브뤼셀 젝키스프렝크 문화관에서 열린 제12회 벨기에 세계아마추어영화제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해박한 영화지식과 사회 부조리 현상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갖춘 지식인이자 예술가였던 그는 튀니지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다른 나라 대표들보다는 한국 소형영화단체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소식과 우리나라 소형영화제의 창립 배경을 비롯한 협회 회원들의 활동 현황 등을 자세히 알려 주었더니 그는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 중 1970년에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가 창립되었고 현재 일곱 곳의 지부에서 수 백 명의 아마추어 영화인들이 활동 중이라고 설명하자 감동받은 얼굴로 다음해 벨기에 세계 아마추어영화제 초청장을 보낼 테니 꼭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다음해 벨기에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된 그가 약속한 대로 일체의 경비를 부담한다는 내용과 함께 협회로 초청장을 보내왔다.
벨기에 영화제는 유럽에서 한국의 소형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릴 수 있게 된 신호탄 역할을 해 준 곳이다. 영화인들끼리 모여 앉아 흥겹게 이야기하고 즐기던 축제 같았던 튀니지영화제와 달리 벨기에영화제는 영화 이론에 대한 토론과 아마추어영화제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 시대별 흐름을 통해 작품의 변화를 통찰하고 소개하는 세미나 형식의 모임들이 많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 일반인 관람객과 각국에서 온 영화인들 가운데 희망자를 상대로 애니메이션 영화제작에 대한 실습 강좌를 해주기도 했다.
나도 강의를 들어보았는데 참석한 일반인들조차 어찌나 진지하게 강의에 열중해 듣던지 감동을 받았을 정도다. 자질이 우수한 강사진과 알찬 내용의 커리큘럼 등 영화제 행사준비에 들어간 경비들을 대충 계산해 보니 비용이 만만찮을 것 같았다. 조심스레 로버트에게 물어보니 모든 행사비용은 전적으로 정부지원으로 이루어진다는 대답이었다. 비상업영화에 대한 일체의 지원이나 정책이 없는(어쩌면 관심조차 없는)우리나라를 떠올리니 바쁜 생활 속에서도 좋은 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애쓰는 우리협회 회원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세계에서 온 많은 참가국들 중에서도 로버트 마랑루 회장은 끝없는 한국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음 해 국제영화제에서는 한국 아마추어 소형영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을 했다. 정말 기대하지 못한 절호의 기회였지만 나는 선뜻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몇 번의 국제영화제 참가 경험을 통해 그런 행사를 치르려면 지불해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큼 소형영화에 대한 지원이 인색한 한국 정부에 서운했던 적은 없었다.
아마 그 시절부터 좀 더 다양하고 적극적인 정책과 지원이 담보되었다면 한국 영화계의 부흥은 훨씬 더 앞당겨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도 비교할 대상이 있었기에 직접 깨달을 수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한국 소형영화 발전을 위해 더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게 해주었다. 무엇 보다 세계 영화제 참석은 근시안적이던 나의 시야를 세계 속으로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튀니지 국제영화제를 통해서 나날이 발전하는 소형영화의 기술적 접근 방식과 다양한 이론들을 배우고 세계적인 단편 영화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면 벨기에 영화제는 한국 소형영화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선물 받은 곳이라 말하고 싶다.
비상업 영화가 상업 영화 못지않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유럽임에도 소형영화인들은 여전히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 시절에도 열심히 고민하고 공부하며 영화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 열정과 치열함은 어떤 세상에 속해있든 영화를 사랑하고 만드는 진정한 영화인에게는 결코 놓쳐서는 안 돼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었다. 바로 그것을 나는 다른 나라 영화인들과의 조우를 통해 다시 배울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