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혹은 최초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이 두 글자 안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용기와 도전의식이 담겨져 있는가. 인류는 항상 최초이자 처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들에 의해 끝없이 진화되고 발전해 왔다. 누군가 두려움에 미처 도전해 보지 못한 영역, 감히 용기조차 내보지 못한 한계 그 너머를 꿈꾸며 무작정 몸으로 부딪혀보는 프론티어 정신. 내가 요즘 시대의 청년들에게 가장 아쉬운 점은 우리 시대와 달리 그들의 생각과 영혼에서 뜨거운 도전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역경에 단련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금수저, 흙수저 같은 말도 언어유희에 불과했다. 우리시대는 말 그대로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게 하루 한 끼나마 두둑이 배를 채워줄 낡은 밥 수저만 챙기고 살아도 고마운 일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학원이나 성적을 따지기 전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대학을 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가족 안에서도 수많은 희생과 상처가 생겨났다. 잘난 큰 놈 하나를 위해 남은 동생들은 재주가 있든 말든, 공부에 뜻이 있든 없든 무조건 포기하고 양보해야 했다. 말하자면 집안의 미래를 위해 온 가족의 희생이 담보되어야 했던 것이다.
고단하고 서러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이 나라 대부분의 노인 세대들은 그 외롭고 모진 세월을 견디며 오히려 역경과 고통의 용광로 안에서 내면의 단단함을 베워갔다. 또 아무 것도 없는 불모지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도전의식도 깨우쳤다.
따지고 보면 나는 계파나 학벌을 따지는 한국 영화계에서 이단아 같은 사람이다. 영화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그쪽으로 체계적인 공부나 지도를 받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일찍이 서구로 유학을 가서 선진화된 유럽 영상예술을 접한 뒤 남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선보여 대중과 평단의 각광을 이끌어 낸 처지도 아니었다.
나는 말 그대로 독학으로 영화를 배웠다.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료는 모두 내 발로 뛰고 내 손으로 찾아냈고 누구의 도움 한 번 없이 촬영지 섭외부터 배우, 촬영, 편집, 녹음까지 모든 일을 내 손으로 직접 해냈다. 그런 시간이 고달프거나 힘겹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단지 행복하고 즐거웠을 뿐이다. 너무나 간절히 꿈꾸고 바라던 일이었기에 도전해 볼 수 있고 스스로 기회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으니 말이다.
UNICA(비상업세계영화인연맹)회원국이 되기 위해 도전하는 일은 내게 그간 극복하고 도전했던 불가능의 과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택의 수가 많은 사람들은 포기도 빠르다. 굳이 절실하게 매달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아니면 다른 답이 없다’라고 절박하게 뛰어든 사람은 결국 그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절실하면 인생의 어떤 문도 반드시 열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국제아마추어영화제가 두 번이나 큰 성공으로 끝나자 각국에 서 개최하는 유명한 해외 영화제로부터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해외 영화제에 참석해 우리나라 단편영화를 열심히 홍보했다. 또 회원들도 매년 우수한 작품들을 출품해 꾸준히 수상의 영광도 차지했다.
그렇게 한국단편 영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나가던 차에 2000년 6월 오스트리아 에벤세국제영화제로부터 초청장을 보내왔다. 우리나라 단편영화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변인식 영화평론가와 회원 32명을 동반해서 영화제가 열린 오스트리아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맨 처음 세계 UNICA회원국으로 가입을 권유한 오스트리아의 에리히 리스(Erich Riess)회장과 조우했다. 그는 우리나라를 새로운 UNICA 멤버로 강력히 추천해 주었다. 사실 나는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서울국제아마추어영화제를 통해 이룬 성공을 기반으로 국내 대중들에게 소형영화에 대한 인식을 좀 더 확대해 나가는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히 리스 회장을 위시해 유현목 감독과 변인식 영화평론가, 하한수 감독 등 한국 영화계의 기둥과 다름없는 분들이 UNICA회원국 가입을 적극 권유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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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UNICA 룩셈부르크 대회에서 / 이 대회에서 한국은 UNICA 회원으로 승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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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들의 독려를 받고 보니 ‘그래 나 이전에 아무도 도전해 보지 않은 일, 내가 한번 제대로 성공시켜보자’라는 오기가 생겨났다.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이들과 우리나라가 무슨 세계영화연맹 가입이냐며 미리 반대하고 나서는 이들로 의견이 분분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회원국 가입을 위한 적극적인 준비에 나섰다. 수많은 관계자들을 만나고 필요한 절차를 밟아 드디어 2002년 6월 1일 74명의 발기인과 18개 시.도회 및 8개 대학 영상서클로 이루어진 한국영상예술협회가 창립되었다.
그리고는 세계 UNICA본부에 회원국 가입 신청서를 접수했다. 마침내 같은 해인 2002년 8월29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제 64차 UNICA총회에서 우리나라는 42번째 회원국이 될 수 있었다.
어떤 나라도 반대하지 않은, 만장일치의 결과였다. 귀국하자마자 협회 주관으로 성대한 파티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었다. 모두의 축하 속에서 사람들과 기쁨을 나눈 후 파티가 끝날 무렵 혼자 빠져 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응접실에 아무도 없이 덩그러니 혼자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사나이 인생에서 눈물은 딱 세 번 뿐이라는데 어린 시절 책이나 영화에 빠져 울던 일 말고 달리 눈물을 흘려 본 기억이 별로 없어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내가 UNICA회원국 가입을 위해 백방으로 뛰며 쏟아 부은 노력과 열정은 이전에 누구도 시도해 보거나 도전해 보지 않은 일들이었다. 어쩌면 혹자는 대단할 것 없다고 폄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맨 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열심히 땅을 파고 흙을 고르고 파종을 했다. 한국에 대한 홍보자료를 준비하고 영화제에 선보일 우수 작품도 선정하면서 국내 유력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당부했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환경에서 회장인 나를 비롯한 우리 회원들은 그야말로 백의종군의 심정으로 부지런히 뛰었다. 오로지 한국단편영화의 발전을 기원하며 열정과 노력으로 일궈낸 귀한 이 시작점은 분명 한국단편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의미로 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