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한국단편영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나의 생각이 착각일 수도 있다. 내가 떠난 후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장찬주’라는 이름석 자 조차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잊혀 질 것이다. 그런들 어떠하리, 이름 없는 무명의 영화인으로 사라진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매 순간의 최선이 기록에 남는 영예를 얻기 위함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단지 나의 도전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단편영화계의 성장과 발전은 몇 년 더 늦춰졌을 것이다. 나와 다른 회원들의 희생과 노력이 한국 영화가 오늘 같은 장족의 발전을 해나가는데 밑거름이 되는 한 알의 씨앗이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것을 위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었고 손에 땀이 배이도록 수많은 사람과 악수를 나눴고, 끝없이 ‘한국 영화’를 알아달라고 외쳤다. 그 숱한 노력들은 아름다운 결과로 열매 맺게 된 것이다. 그것으로 나의 도전은 충분히 가치 있었고 성공적이었다. 아마 그 도전이 실패로 끝났다 해도 좌절하기보다 누구도 도전해보지 않은 첫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또 도전은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의 선배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젊음이들에게 이런 도전 정신을 스스로 해 보기를 당부하고 싶다. 포기에 익숙해지는 순간 동시에 삶의 곳곳에 숨겨진 수많은 가능성의 기회들도 문이 닫치고 만다. 때로는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누구도 과거에 시도해 보지 않은 일에 젊음과 패기를 걸어 보라고 적극 권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시작으로 스스로 어떤 일의 시작이자 출발점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 뛰는 이름 아닌가, 이토록 눈부시고 찬란한 나이에 새로움에 도전하고 실패해 보는 경험도 젊은 청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그러니 가슴 설레는 도전정신을 잃지 말고 누구보다 뜨겁고 용기 있게 살아보기를 한 사람의 인생 선배로서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세계 UNICA(비상업세계영화인연맹) 멤버로 승인을 받고 난 후 2002년 12월 16일 문화관광부에서는 우리 협회를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허가를 내 주었다. 행정적인 절차들이 마무리되자 본격적으로 한국 단편영화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실질적인 방법들을 고심하게 되었다. 동시에 협회 회장으로서 앞으로 해나가야 할 업무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당장 산적된 업무들이 너무 많아 어떤 것부터 해결해 나갈지 막막했다.
회장으로서 순차적으로 풀어가야 할 현안들을 정리하다 보니 당장 급한 문제가 2003년 제 65차 UNICA 폴란드 총회였다. 영화제에 참석할 작품을 선별하고 한국을 알리는 홍보물들을 준비해 회원들과 처음으로 UNICA세계영화제에 참가했다. 기존의 회원국들과 비교하면 여러 모로 준비가 부족했겠지만 각국 대표들과 회원들은 대체적으로 신입회원국인 우리나라를 반겨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제 66차 UNICA 독일총회에서 러시아와 아프리카 튀니지를 물리치고 제68차 UNICA총회와 UNICA세계영화제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열심히 하면 머잖아 그런 행운도 얻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너무 빨리 기회가 주어지니 무턱대고 환호성만 지를 수는 없었다. 당시는 지금보다 정치적 시국이 더 어수선하고 안보 상황도 심각했다. 그 때문에 세계 각국 대표들이 우리나라 정치상황과 분단국가의 안보를 문제 삼아 참가결정을 주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편 영화뿐 아니라 장편 영화계에서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한국 영화인이 드물다 보니 아마 한국이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정도의 문화예술분야의 후진국이라는 편견이 강했던 것이다.
치안문제로 인한 불안감 때문에 각국 대표들은 참가 신청을 망설였고 예상은 했지만 정작 당면하고 보니 회장의 입장에서 참가국 미달사태 같은 불명예라도 입을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결국 각 나라의 대표들 중심으로 구성된 본부 실사단 18명이 2004년 4월에 한국을 직접 방문해 정치와 안보상황을 먼저 확인하게 되었다. 스위스를 비롯해 룩셈부르크, 벨기에, 러시아 등 많은 나라 대표들이 방문단의 일원으로 직접 우리나라를 찾아왔고 회장인 나는 만사 제쳐두고 그들의 일정에 동행하며 가이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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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 개최된 제68차 UNICA총회와 UNICA세계영화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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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고궁, 인사동, 민속촌, 이천 도예마을, 제주도, 남대문시장, 판문점 등 우리나라 주요 관광지들과 서울 시내 곳곳을 구경하는 동안 각국 대표들은 조금씩 변화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는 심리적 불안을 주던 요소들이 막상 한국에 와서 보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표단들은 점점 여유 있게 우리의 문화와 자연을 느긋하게 즐기기 시작했다.
방문단이 실사를 끝내고 돌아가 총회에 한국 답사보고서를 제출한 이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제 68차 UNICA총회와 세계영화제는 회원국 대부분이 참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만약 실사단 방문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첫 UNICA총회와 세계영화제 개최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본부에 실사단 방문을 요청하고 또 한국을 방문한 각국 대표들이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돌아갈 수 있도록 회장인 나를 비롯해 임원들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 한 결과 각 나라 대표들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2006년 제68회 UNICA총회와 세계영화제를 대구와 경주에서 개최했다. 개최지 선정과정에서 다른 대회와 달리 이런 저런 불안과 우려가 있었지만 총회와 세계영화제는 전에 없이 즐겁고 유려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우리 협회는 평소 단편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일반 대중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기획들을 준비했다.
더구나 도시라고 해도 대구나 경주는 서울에 비해 다양한 문화 콘테츠를 즐길 기회가 현저히 부족했다. 모처럼 자국에서 열리는 세계영화제이니 만큼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각국에서 개최한 포스터전시회 등을 준비했다. 예상 밖으로 많은 관객들이 참여했고 그 계기로 한국 UNICA 협회를 대중들에게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번잡한 도시가 아니라 소박한 중소도시 두 곳에서 이색적으로 열린 UNICA총회와 세계영화제는 각국 대표들의 호평과 극찬 속에서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UNICA 막스 헨슬리 총재를 비롯해 많은 UNICA임원진들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느 대회보다 더 한국적인 느낌으로 다양한 행사를 마련한 한국 UNICA 협회에 격려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공로를 높이 평가해 2007년 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69차 UNICA 총회에서는 회장인 내게 공로 훈장을 수여해주었다.
1931년 유네스코 산하로 UNICA가 창립된 이래 개인이 그것도 아시아 영화인이 이렇게 큰 상을 수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영광은 나 혼자의 능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UNICA한국협회 모든 회원들이 후배 영화인들에게 현재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했기에 가능했다.
앞선 자가 견뎌내는 오늘의 희생은 분명 뒤를 따라 걸어오는 자에게 안락한 내일을 선물하는 법이다. 단편영화를 공부하는 후배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영화인들은 꼭 기억해 주기 바란다. 오늘 한국 영화의 찬란한 영광 뒤에는 선배 영화인들의 피땀어린 눈물과 헌신이 있었음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