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지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노인은 이름 없는 무덤 같은 것이다. 흔적은 있으나 찾아오는 이 없고 기억하는 이도 없는, 망각의 묘지 같은 존재다.’라고 말이다. 기운이 팔팔하던 시절에는 농으로 듣고 넘겼으나 흰머리 성성한 이 나이가 되어서 생각해보니 새삼 그 농담이 가슴 절절한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작년 11월 중순, 고향 용문에 첫 눈이 내렸다. 집 마당의 소나무 가지 위로, 오래 된 모과나무에도 흰 눈이 소담하게 쌓여간다. 도시에서 한창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눈이 오면 출퇴근길 걱정부터 앞섰는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다시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눈 내리는 날이 하염없이 반갑기만 하다.
서둘러 카메라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 서서히 설원으로 변해가는 들판과 마을 풍경을 쉴 새 없이 필름에 담아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해져 눈물마저 나오려 들었다. 나이 드니 어린 계집아이처럼 툭 하면 눈 속부터 젖어드니 이러다 정말 남들 앞에서 제대로 망신살이 뻗칠까 민망하기 짝이 없다.
초겨울에 이르자 우울한 마음이 점점 깊어졌다. 딱히 말동무도 없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세상 끝에 혼자 버려진 느낌도 든다. 그럴 때마다 산책길에 나서 어릴 적 동무들과 몰려 가 뛰어 놀던 뒷동산으로 올라간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한 눈에 들어오는 고즈넉한 복천 마을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너른 들판과 고브장한 시골 길, 또 마을 사이 사이로 아기자기하게 들어앉은 소박한 집들. 별스러울 것 없는 그 경치가 까닭모를 설움으로 들끓던 마음을 토닥이며 위로해 준다. 어렸을 때는 저 넓은 들판의 보리가 익어가는 단오절이면 동네의 어여쁜 부녀자들이 모두 나와 그네를 타곤 했다. 그네들이 하늘 높이 뛰어 오를 때마다 바람에 휘날리던 오색빛깔의 치마 자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까까머리 사내아이들로 북적거리던 옛날과 달리 인적을 만나기 힘든 뒷동산에는 몇 그루 남지 않은 노송이 스산하게 집 마당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 옆에서 이런저런 상념 속을 서성인다 ‘속절없이 또 한 살 더 들었구나, 이제 남은 생의 날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까지 이르자 주책맞게도 낙루가 절로 흐른다. 흥이 많은 성격이라 어지간한 일로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편인데 세월 이기는 장사는 없는 모양이다.
나같이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되려 속편한 사람이 하는 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신적으로 몹시 힘겨운 일이다. 이래서 노년의 죽음을 ‘무료사’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인생의 남은 날들을 낭비 없이 알뜰하게 보내려고 고향에서 열리는 다양한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예천군에서 주관하는 어르신 건강축제니 지역 농산물 축제에 참석요청이 들어오면 마다 않고 나가 어울리고 예천 문화원이 주관하는 전국 문화유적지 탐방도 따라가 바람도 쐬고 세상 구경도 한다.
또 전국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초당기념관을 찾아주는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니 기대 이상의 즐거움이자 낙이다. 오로지 영화에 대한 관심 하나로 먼 길 마다않고 찾아와 지난 UNICA KOREA의 활동과 회장으로서의 노력한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수고하셨다 덕담까지 남겨주니 감사하고 행복하기 그지없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위로받는 기분처럼 기분 좋은 일은 어디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의 말처럼 노년은 생(生)과 사(死)의 중간 역 쯤 되는 지점일 것이다. 돌아갈 길이 없는 그 자리에서 불현듯 느끼는 두려움과 외로움은 늙어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억지로라도 바삐 움직이며 애써 즐거움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나 역시도 수시로 서럽고 쓸쓸하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황무지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절대 고독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노년의 나약한 감정에 지고 싶지는 않다. 우리 세대는 격정의 역사를 살아냈고 힘겨운 고도성장의 시대를 열정으로 버텨내지 않았던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낸 우리 노인들의 인생이야 말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인 것이다. 그러니 시들어 버린 육체에 침울해 할 필요 없다. 비록 신이 건강함을 거둬 가셨을지언정 아직 세상에 머물며 나들이 할 시간은 남겨 두지 않았던가.
그 시간들은 망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오로지 우리, 살아남은 사람들만의 선물인 셈이다. 그리 생각하니 어제까지 마음에 무겁게 매달려 있던 외로움이 덜어지는 기분이다. 허허롭던 마음을 다독여 다시 산책길에 나서고 찾아오는 향민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고 기념관을 찾아 줄 손님들을 맞이해야 할 때이다. 살아 있다. 아직 나는 살아있지 않은가. 아직 아름다운 이 생의 날들이 남아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