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手來空手去是人生(공수래공수거시인생)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날 때는 어느 곳에서 왔으며, 갈 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인 듯하고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자체가 실이 없나니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
죽고 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도다
獨一物常獨露(독일물상독로)
그러나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드러나
湛然不隨於生死(담연불수어생사)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네
고려 말 고승 나옹화상의 누님이 동생에게 염불을 배운 후 지었다는 <부운(浮雲)>이라는 선시이다. 구절구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것은 바로 요즘 내 마음의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화자찬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참 욕심 없이 살아왔다. 나 뿐 아니라 우리 사남매 모두 어려서부터 네 것, 내 것 따지는 일 없이 좋은 것은 양보하고 귀한 것은 나누며 살아왔다. 없는 형편이라 쟁여 둘 물건도 없었지만 어쩌다 맛있는 음식이나 물건이 생겨도 혼자 그걸 차지하겠다고 고집 부려 말썽이 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자기 손에 쥔 것은 항상 형제나 이웃과 나누는 습성이 몸에 배인 탓에 어른이 되서도 흔한 말다툼 한 번 없이 의좋게 지내왔다. 지금도 고마운 것은 장남인 나의 학업을 위해 손아래 동생들이 적잖은 희생을 해 온 점이다.
빚지고 못사는 성격 탓에 동생들의 이런 희생이 평생의 짐이었는데 고맙게도 아우들은 다들 제 안의 또 다른 재주를 찾아 잘들 살아간다. 손재주 좋은 막내 동생은 문방용품중 하나인 붓을 만드는 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대견하고 감사한 일이다. 원래 정결한 마음에서 최고의 붓이 만들어지는 법인데 선친을 닮아 성정이 곧고 반듯한 동생이니 붓 장인이야 말로 천직이 아닌가 싶다.
또한 장낙범도 재주가 있어 재학 중에 건축기술사로 합격하여 현재 삼성그룹의 간부로 재직하고 있으니 마음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평생을 교육 공직자로 살았고 또 영화라는 한 길만 매진하다 보니 나 역시 큰 재산은 만들 재주도 욕심도 없었다. 그저 남들에게 손 벌리는 일 없이 가족들 건사하고 자식들 공부 시킬 수 있을 만큼은 성실히 돈을 모았다. 세상에 가장 재미있는 일이 주머니 속 쌈짓돈 늘여가는 일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식솔들이 옹기종기 살던 한 칸 살림이 두 칸으로 늘고 다시 돈을 불려 갓난 아이 손바닥만한 옹색한 마당 딸린 작은 집을 사 이사 가던 날의 기쁨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가족들 모두 오롯이 힘을 합쳐 열심히 아껴 모은 돈으로 사 모은 살림들이니 수저 한 벌, 밥공기 하나까지 각별하고 소중했다. 그런 세월이 쌓여가는 동안 매년 세간들도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헌 물건 하나 버리는 일도 간단치 않았다. 가족들의 소중한 추억이 배인 물건이라 버리기 주저되었고 언제 다시 쓸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미련 때문에 쟁여두기 바빴다. 그렇게 집은 비움의 미덕을 잊은 채 가득 채워져만 갔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바람은 나이가 더 들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쏟으며 살고 싶다. 또 설레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망설임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용기와 환경을 갖추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삶과 생각이 단출하고 홀가분해야 가능한 일이다. 넘치는 물건이나 생각을 덜어내고 최대한 가벼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 올 때 세간들을 과감히 정리했다. 가진 것에 집착하다 보면 진짜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불필요한 짐을 덜어낼수록 삶은 가벼워지고 덜어낸 크기만큼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명지대학 재직시절에 소중하게 보관했던 자료들 198점은 명지대학교 박물관을 개관할때 모두 기증을 했고 나머지 버릴 것은 버리고 필요로 하는 물건은 새 주인을 찾아 실어 보냈다.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짐들이 사라지고 빈 공간이 늘어날수록 속이 시원해졌다.
결국 인생은 공수레 공수거(空手來空手去). 가진 것을 내려 놓을수록 생에 대한 집착도 미련도 거둬 낼 수 있음을 망구(望九)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다. 이후 새 집에는 꼭 필요한 살림들만 갖춰 두었다. 비움으로 여백으로 생겨난 집에 앉아있으니 마음도 한결 가볍고 편안해졌다. 꽉 막혀있던 영혼의 숨길이 트인 심경이었다.
남들은 나이드니 서러움만 남는다는 데 나는 풍파의 세월 훑고 간 지금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나무 중에서도 모든 걸 털어낸 것은 겨울나무뿐이다. 봄에는 꽃이 여름에 무성한 잎사귀가 동무하고 가을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지만 겨울나무에는 아무것도 없다. 몸에 지닌 모든 것을 털어냈으니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내려도 걱정이 없다.
오늘 현재의 심정이 바로 겨울나무와 같다. 손에 움켜쥔 것 욕심을 내려놓고 빈손이 된 지금이 한없이 가볍고 편안하다. 짊어지고 갈 짐 하나 없는 지금의 내 나이가 말 할 수 없이 홀가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