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이어 열린 슬로바키아 세계영화제는 규모나 준비 결과물들이 다소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른 나라 대표들도 우리나라에서 열린 영화제와 비교가 되었는지 다소 실망한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슬로바키아의 검소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가난하게 살던 어린 시절로 다시 되돌아간 느낌이 들어서였다.
의식주와 사회복지가 안정되고 풍요로운 서유럽 국가의 밝고 환한 분위기와 달리 슬로바키아의 분위기는 우울한 겨울비가 내리는 거리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도 생기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아담한 건물들 사이에 놓인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가다 보면 곳곳에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양식의 모든 건축 양식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중세 건축물들의 집합소 같은 느낌을 주는 나라였다.
서유럽 국가와 차별화된 분위기의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관광 수입을 창출하기 위한 아이디어와 시스템을 확충할 방법을 찾지 못해 외화를 벌어들이지 못하고 있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래서 슬로바키아 영화협회는 매년 열리는 UNICA세계영화제를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영화제에 참석한 각국 대표와 회원들에게 자국의 유명관광지들을 둘러볼 수 있도록 모든 편의와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들의 호의를 받아 슬로바키아의 명소인 관광열차를 타고 그 유명한 타트라 산맥을 넘어갈 때였다. 산맥 주변의 벌목장에서 회원들 모두 톱질 체험에 도전해 다른 이들은 모두 중도 포기했지만 어려서부터 집안 살림을 돕는 것에 이골이 났던 나는 능숙한 톱질 솜씨를 보여 다른 나라 회원들의 힘찬 박수갈채를 받았다. 아름다운 타트라 산맥의 풍경도 잊을 수 없지만 그 날 톱질에서 받았던 환호성과 박수 또한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2010년 스위스 아인지델른에서 열린 세계영화제 기간에는 인생에서 다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위스 막스 핸슬리 UNICA총재는 2010년 스위스 아인지델른 세계영화제가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개인 시간까지 할애해 나를 비롯한 한국회원들을 동반하고 스위스의 유명 관광 상품인 직접 스위스의 자수를 짜는 곳과 말의 방울목걸이를 제작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 인간문화재인 장인을 소개해 주었다.
또 유명 관광지를 다 돌아 본 후 막스 회장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취리히 호수 남쪽에 자리한 아인지델른 수도원이었다. 930년에 건립된 이 수도원은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베네딕토 수도원이었다. 성당 입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검은 마리아(Black Maria)가 모셔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곳인데 막스 총재의 권한으로 특별 관람을 허락받은 것이었다. 이곳에서 중세시대의 파이프오르간 연주까지 선물 받았으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귀한 추억을 선물 받은 우리는 모두 막스 회장의 배려와 정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스위스 뿐만 아니었다. 2008년 영화제가 열린 아프리카 튀니지에서는 정부에서 UNICA의 각국대표 만이 아니라 영화제 참가자 모두를 관광시켜 주었다. 당시 영화제가 열린 함마메트는 푸른 지중해 물빛과 끝없는 모래사장을 품은 북아프리카 최고의 휴양지였다.
시내 관광뿐 아니라 옛 카르타고의 화려한 유적지를 구경할 수 있는 카르타지와 께르꾸안, 프랑스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아기자기한 재래시장과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로마시대로 되돌아 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캘리비아, 전설의 영화가 된 스타워즈의 주요 촬영지인 마트마타와 타타윈, 이슬람 4대 성지중 하나인 카이로우안 등을 돌아보았다.
튀니지 문화부장관이 직접 나와 우리를 영접했으며 일반 관람객들과 관광동선이 겹쳐 불편을 겪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며 정성껏 대접해 줘서 아주 편하고 즐겁게 관광을 할 수 있었다.
2009년 폴란드 세계영화제에서는 자국 협회의 적극적인 가이드 덕분에 크라쿠프(Krakow)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700년 소금채취의 역사를 간직한 비엘리츠카의 소금 광산을 구경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의해 도시의 문화유산이 약 80%이상 파괴되는 역사적 고통을 겪었으나 다행히 전쟁이 끝난 후 옛 모습 그대로 완벽히 복원 재건되었다. 우리는 그다니스크 조선소와 베스테르플 라테, 두우기 광장의 넵툰 분수, 구시가의 성모 마리아 교회 등을 관광했다.
특히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는 두우기 광장은 베네치아의 산마트로 광장이나 브뤼셀의 그랑플라소에 견줄 만큼 아름다운 관광지로서 중세 귀족들의 저택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197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교통이 다소 불편해 개인적 여행이었다면 아마 구경할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폴란드는 공산 체제에 맞서 자유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경제는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폴란드 협회의 펄스 대표는 나를 만날 때마다 자국의 경제 불황을 하소연하며 우리나라가 이룬 눈부신 경제성장을 몹시 부러워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개최된 폴란드 영화제는 세계적인 영화제 개최를 계기로 자국 경제난의 탈출구를 마련해 보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2011년 룩셈부르크 세계영화제는 유럽 지역에서도 비상업 영화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곳이다. 정부의 지원도 체계적이고 아마추어 영화 인구도 많다. 인구수 50만 명도 안 되는 작은 나라인데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복지 시설 때문에 인간의 행복권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일상은 느긋하고 평화롭기 짝이 없다. 도시 전체에 장고한 세월의 켜가 쌓인 듯 고전미와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정치 경제적 부국이면서 동시에 환경과 자연에 대한 사회의식이 분명해 관광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고전적인 아치형 석조대교 아돌프 다리와 적의 침입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요새 보코의 포대, 룩셈부르크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노트르담 성당은 북유럽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신이 그린 한폭의 수채화 같았다. 특히 천년 세월의 유구함을 간직한 건축물 보크포대는 룩셈부르크의 가장 큰 볼거리이자 빼놓을 수 없는 관광코스다.
지금도 그 때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북유럽의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들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