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내려와 지내면서 가장 고픈 것이 바로 사람의 정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도 좋지만 역시 사람은 나이 들수록 곁에 말을 섞을 누군가가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실히 느끼게 된다.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허물이나 경계 없이 지내다 보니 그동안 주위에 늘 친구나 이웃들이 많았다.
특히 사회 활동을 오래 한데다 참여하는 모임이 워낙 많다 보니 직장과 UNICA한국협회장에서 물러 난 이후에도 하루가 늘 분주했다. 찾아 갈 곳도 많고 찾아 주는 사람들로 늘 사무실이 분주했었다. 그러다 고향으로 내려와 아무도 없는 시간을 홀로 보내는 날이 늘어 가다보니 적적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다. 다행이 그동안 운영해 오던 블로그에 부지런히 글과 사진을 올리다 보면 그나마 하루가 간다. 그래도 저녁이면 여전히 텅 빈집에 바람만 들락거리니 청승맞기 짝이 없다.
기억을 돌이켜 보면 옛 시절 집집마다 고향을 멀리 떠나 소식조차 알 수 없는 형제나 친지들이 더러 있었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절.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했고 그리움에 익숙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자신을 달래던 시절에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훨씬 더 절실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SNS라는 사회관계망 서비스가 워낙 발달해 있어 누군가를 그리워할 여유가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외국에 나가 있는 가족도 지방 곳곳에 흩어져 있는 친구나 이웃들의 소식부터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식까지 훤하게 알고 있으니 소식이 궁금할 이유도 그리워할 까닭도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10대와 20대뿐만이 아니라 중장년층에서도 SNS 사용량이 늘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중장년층 역시 SNS로 지인들과 소통의 장을 열기도 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인맥을 만든다고 한다. 이제는 남녀노소가 사용하는 일종의 소식통이 된 셈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회는 이 소식통을 통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트렌드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나 역시 인터넷 사용도 할 줄 알고 블로그도 직접 운영하며 많은 컴퓨터 유저들과 소통하고 있다. 내 연배에 비하면 그래도 비교적 최신 문명들을 사용하는 데 익숙한 편이다. 그럼에도 SNS사용은 별로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소식을 매일 실시간으로 전해 듣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데다 그리운 이의 소식은 좀 더 따뜻한 방식으로 전해 듣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이런 기기들이나 문화가 없어도 사람과 사람간의 정이 참 깊었다. 경북고등학교 동창들 중에는 수십 년 시절이 지난 지금까지도 막역한 사이로 서로의 허물까지 다 내보이며 친밀하게 지내는 벗들이 꽤 있다. 그 친구들과는 일 년 내 제대로 소식 한 번 주고받지 못해도 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
또 37년을 재직한 명지대학교에서 만난 소중한 지인들과도 항상 서로의 안부를 챙기며 깊은 세월의 정을 나누고 있다. 직장생활에서 만난 동료들은 어린 시절 고향 친구들이나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는 좀 차원이 다른 정이 있다. 전쟁터같이 살벌한 사회생활을 함께 견뎌내 온 전우애와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 명지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보직교직원들로 이루어진 ‘명일회’ 회원들과는 정년퇴직이후에도 서로 살뜰히 안부를 챙기고 월말이면 함께 산행을 하며 우정을 다져 나갔다.
|
|
| ▲ 연세대학교 동문들로 이루어진 연우회 모임에서 (1996. 7. 17.) |
|
이 모임의 멤버는 이범국 부총장, 신용진 교무처장, 박영휴 경제과 교수이자 전 학군단장, 김용성 교육대학원장, 김광선 인문대학장, 송승기 이과대학장, 임원재 시인, 최인범 사무처장, 정성훈 교무부장, 엄무용 비서실장 등이다. 이 가운데는 엄무용 실장이 이제 건강이 나빠져 최근에 모임에도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더 애틋해져만 간다. 명일회와 더불어 인생 최고의 지인들과 결성한 명상회도 넘치던 기운을 여행이나 산행으로 풀어보자며 결성된 친목모임으로 명지대학에서 행정과장급 이상 정년퇴임한 교직원들이 있다.
한창 젊었던 시절에는 가족과 명지대학을 위해 봉사하며 사느라 정작 ‘나’를 돌보지 못했으니 노년에는 우리 자신을 위해 유쾌하게 즐기며 살아보자고 결성된 모임인데 정작 노년이 이르니 계획했던 것 만큼 여러 곳을 다니기가 여의치 않다. 몸이 내 마음 같지 않으니 외출도 조심스럽기만 한 나이다. 그래도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두 모임을 통해 회원들과 함께 국내 이름난 절경들과 관광지들을 찾아 다니며 저물어가는 황혼의 우정을 다져나갔다.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각별한 또 하나의 모임은 나의 절친 네 명으로 이루어진 ‘사륜구동’이다. 벌써 이름에서 부터 장난기와 호기로움이 전해지듯 나를 제외한 사무처장 최인범 선생, 학생처 동료였던 정성훈 선생, 비서실장 엄무용 선생 세 명의 벗들은 단순히 같은 모임의 회원을 넘어 인생에서 어떤 누구보다 각별하고 소중한 존재 들이었다.
사륜구동이라는 이름도 자동차에서 엔진의 동력이 앞뒤 네 바퀴 모두에 전달되어야 차가 움직이듯 우리 네 사람도 서로의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며 누구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모임 자체가 결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심오한 뜻을 담아 만장일치로 붙인 이름이었다. 세 분 모두 정신적으로 나보다 훨씬 성숙하고 그릇이 큰 분들이라 내가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마다 냉철하고 현명한 조언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평소에는 자기 말을 하기보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고고한 선비들 같은 세 양반과 나는 삶의 성향이 닮기도 했지만 애주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성적이면서 선하고 반듯하고 배려심 많았던 이들과 얼마나 많은 두주불사의 밤을 보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물론 각자의 가정에서는 더할 나위없는 원흉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빈 술병의 숫자가 늘어 갈수록 우리 넷의 우정은 더없이 깊고 단단해졌다.
이처럼 휴대폰이나 문자니 SNS같은 것이 존재하지도 않고 세상없이 편하다는 소통방식을 알지도 못했던 그 시절 세련된 지금 사람들보다 더 다양한 모임들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을 배웠고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일인지 몸으로 체득해 갈 수 있었다.
내가 그래왔듯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하고 배워나가기도 한다. 때로 배신당해 우는 날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로 인해 행복하게 웃는 날도 있었다. 그런 일상들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소통을 배우고 희노애락의 감정을 배운다. 하지만 문자나 SNS는 이러한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정(情)’을 가로막은 느낌이다. 멀리 떨어진 친구를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만날 수 없는 연인을 가슴에 품고 간절히 기다리던 중 그 소식이 찾아 든 날, 세상 모두를 얻은 듯 기뻐하던 오래 전 그 시절 사람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동시에 옛날의 깊은 정도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기다림이 견뎌낸 그리움이 더 간절하고 진한 법이 아니겠는가. 애타는 심정으로 수많은 불면의 밤을 견디고 수천 번의 그리움을 담아 손편지를 쓰던 끝에 기어코 만난 얼굴이나 전해들은 소식이 더 없이 큰 행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옛날 옛적, 그리움과 기다림은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의 소통이었다. 그래서 전화 한통, 문자 한통으로 금방이라도 그리운 이를 만날 수 있는 지금보다 나는 옛날 옛적 그 낡은 소통방식이 마냥 그립다. 한없는 기다림을 동반하던 그 시절의 그리움이 애틋하고 그립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