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좋아하는 조병화 시인의 묘석에 새겨진 글귀라 한다. 참으로 시인다운 묘비명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인들의 묘비명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몇 개 소개하고자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쾌하고 촌철살인의 명언이라 회자되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였다. 미국의 유명한 방송인 ‘자니 카아슨’이 미래 묘비명이라고 발표한 말은 ‘곧 돌아오겠습니다.’였다. 사람들에게 걸레스님으로 더 많이 알려진 중광스님의 묘비명은 ‘에이, 괜히 왔다 간다’였다. 또 천진한 아이 같던 천상병 시인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고 자신의 시 한 구절을 묘비명으로 차용하였다. 살아생전 아이처럼 천진하고 순진무구했던 시인은 그의 삶만큼 맑고 깨끗한 동요 같은 비문을 남겼다.
‘비상(非常)한 재주를 가졌으나,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功)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한 죽음을 맞이하였도다.’ 풍운아 김옥균 선생의 묘비명은 구절구절 비감하고 절통하다. 불꽃같던 김옥균의 일생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조선말 개화사상가인 유길준 선생이 썼다고 전해지는 이 묘비명은 현재 일본의 아오야마 지역에 있다고 한다.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은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라고 작가다운 묘비명을 남겼다. 평생 노처녀로 산 여성 우체국장은 ‘반송-개봉하지 않았음’이라고 읽는 이들 모두 유쾌하게 웃고 넘길 수 있는 묘비명을 남기기도 했다. 한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고 김수환 추기경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라는 비문을 남겼고 얼마 전 타계한 미국의 전설적인 흑인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묘에는 ‘알리’라는 소박하고 간단한 비명이 새겨졌다.
아주 감동적인 글도 있다. 어느 부모들의 묘비명에는 ‘얘들아 밥은 먹었니?’ 또는 ‘너희들을 늘 지켜보고 있다’라고 하니 죽어서도 자식걱정은 부모의 몫인 모양이다. 개인적 친분이 있던 어느 이름 없는 문인의 묘비명에는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쓰다가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 길지 않은 삶을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글을 쓰다간 사람인만큼 그보다 더 적절한 비문은 없을 것 같다.
독일의 시인 릴케는 ‘일찍 떠난 자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라고 한다. 사실 가슴 절절한 통곡과 애도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일체의 요구도 없으니 자신의 삶을 어떤 말로 정리하고 싶은 지도 알 도리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한 해 한해 나이 들어 갈수록 생의 마지막에 대비해 조금씩 준비해 두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나 역시 내 죽음 앞에 황망해 할 자식들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미리 이런 저런 것들을 정리해 두고 있지만 비석에 새길 묘비명만큼은 선뜻 정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전 짬을 내어 유명 인사들의 비문들을 찾아 보았다. 몇 줄 밖에 안 되는 짧은 글귀들이지만 한 사람의 생을 정리하는 글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의미 있고 감동적인 명문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영국의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가장 인상적 이었다 조지버나드쇼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다.
생명 철학에 기초한 작품 『인간과 초인』으로 세계적인 극작가로 발돋움했으며, 19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렇듯 대단한 문학가인 동시에 사상가였던 그는 94세까지 살면서 항상 유머와 풍자, 위트를 잊지 않았으며, 사회적 모순과 불의에 맞서는 행동하는 지식인 이었다고 한다. 늘 약자들의 편에 서서 권력과 기득권세력을 향해 날카로운 팬과 독설로 비판을 가했고 자유와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낸, 진정한 지성인이었다. 버나드 쇼가 남긴 명언 중에 또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 자신이 쓰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제 각각 다르다. 어떤 이는 성공이나 명예일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가족의 행복과 안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위해 자신을 오롯이 던질 수 있을 때 그 생은 최고의 가치와 행복을 지니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내 묘비에는 어떤 비문을 새겨야 지나온 생과 걸맞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화장(火葬)이나 수목장(樹木葬)을 선호하기 때문에 장차 무덤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묘비는커녕 납골당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또 누구나 묘비를 다 세우는 것도 아니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한다는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의 묘비명을 만들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멋을 부리거나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과장하거나 지어 낼 필요는 없다. 앞서 언급한 많은 이들의 묘비명에서 볼 수 있듯 비문은 말 그대로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이력이자 흔적이다. 기억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면 지금 부터라도 원하는 그림을 그리듯 차곡차곡 밑그림을 그려나가면 된다. 그러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완결시키면 되는 것이다. 묘비명은 죽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남기는 것이니 원하는 만큼 수정도 가능하지 않은가.
개인적 생각이지만 결국 표표히 사라질 인생, 휘황찬란하고 화려한 수식어는 필요치 않다고 본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등소평의 유언이야말로 공수레 공수거의 빈 손 인생과 가장 걸맞는 비문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옮겨 적는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난센스다. 각막은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하고 신체 일부는 의학용으로 활용해라.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고별식도 하지 말고, 조문소도 설치하지 말라. 유골은 바다에 뿌려라.’
내 마음도 등소평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을 떠나 사의 세계로 접어 든 몸이 고대광실같이 화려한 무덤을 차지하고 누워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집안의 후손들이 때가 오면 찾아와 인사나 나눌 수 있게 소박한 선산에 먼저 간 가족들과 자리 잡고 누워 ‘이생의 매 순간, 누구보다 진실 되고, 사람답게 살다 간 사람, 장찬주’ 이 정도 검박한 비문 하나 남길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