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 (116회)

열 번의 항암치료

1월 24일 세브란스에 입원하고 1차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세브란스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삼성의료원의 이제호 박사가 소개해준 텍사스 주 휴스턴에 있는 M.D. Anderson (MDA) 암센타의 김의신 박사와 이메일을 통해 수시로 자문을 구했다. 그 결과 그곳의 종양내과의 컬리(Curley)박사가 추천한 항암주사약은 Leucovrine, 5-FU, CPT-11이었다.

그러나 노재경 박사는 그 세가지중 한 가지를 빼고 대신에 프랑스제인 Oxaliplatin이라는 항암주사약을 쓴다고 했다. 의료보험이 적용이 안 되는 고가의 약이었다. 항암주사약도 어떤 것은 우리가 외부 약국에서 구입해야 하는 것도 있고 병원 약을 쓰는 것도 있어서 헷갈릴 때도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부터 어지럽고 메스껍고 배가 더부룩하다고 호소를 했다. 입안이 헐고 설사에 시달렸다. 모두 항암 약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식사 전에는 꼭 지토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 성우가 저녁을 먹고 암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사들고 왔다. 곁에서 지켜보던 그이가 느닷없이 “하나님께서 가족들에게 내 병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허락해 주신 것은 다행한 일이야”라고 말했다. 혼자서 별 생각을 다 하는 모양이다. 두 주일간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퇴원 했다.

장 수술 후에도 멀쩡하던 남편이 두 주일간의 항암치료를 받고 나니 기력이 떨어지고 말이 없어졌다.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께 “남편을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2년간 병마와의 싸움 끝에 딸을 보내야 하는 시련을 겪었으니, 이번에는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남편의 병을 고쳐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요행을 바라기도 했다. 그이는 낙담하는 나에게 “이 병은 당장 낫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는 병이니까 초조해 하지 말자”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내가 해야 할 말을 환자가 하게 만든 것이다.

2월 9일 그이가 68세 되는 날이었다. 아들 내외가 자기 아파트에서 아버지 생신을 지내자고 우겨서 며늘아기가 진수성찬을 차렸다. 식기도는 의례히 태섭이의 몫인데 그 날은 그이가 자청해서 기도를 했다. 자기 때문에 가족들이 고생한다며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하는 무척 감성적인 기도를 드렸다. 아이들도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나도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이도 힘이 들었는지 진땀을 흘리면서 땀 씻는 것처럼 하며 종이로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다행히 그날부터 메스꺼운 증세는 없어지고 기분도 훨씬 좋아졌으나 입안이 무섭게 헐어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안타까웠다.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고 억지로 조금씩 먹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식사 후 태섭이가 할아버지에게 쓴 생일카드를 읽어보았다. ‘유명하신 할아버지가 장관하시느라 힘이 들어 병이 나셨는데 차라리 이름이 나지 않고 평범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는 할아버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다가 할아버지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셨는지... 식사도 잘 못하시고... 우리 집의 기둥이신데 안계시면 우리는 웃음을 잃게 될 텐데... 할아버지가 나의 나쁜 버릇을 많이 고쳐주셨는데… 󰡓등, 초등학교 6학년이라 어린 줄만 알았는데 자기 나름대로 괴로웠던 모양이다.

나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 고장 난 수도꼭지 같이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이를 기쁘게 해주려는 세 아이들의 노력이 눈에 보였다. 역시 자식들이 있으니 위로가 되고 덜 외롭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 건강했던 시절의 우리 부부와 김주일 요코하마 총영사 내외와 함께 / 필자의 첫 골프 나들이 이기도

2차 항암치료에서는 1차 때보다 약을 3분의 2로 감량해서인지 입안은 헐지 않았고, 딸꾹질과 안색이 변하는 정도였다. 1차 치료 후 사진을 찍어보니 암세포가 2-3센티가 줄었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다. 3차에서는 무엇보다도 입맛이 없어서 냄비를 들고 호텔 식당에서 복지리, 스끼야끼, 대구탕 등을 병실로 날랐다. 그래도 조금밖에 들지 못했다.

어느 날 하이야트 호텔에서,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를 기다리는데 여학교 동기인 이명숙 교수 자매 내외가 식당으로 들어오다 만났다. “I am sorry"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격지심에 그들의 동정어린 눈빛이 싫었다. 마치 내 신분이 낭떠러지로 떨어진 듯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남편이 잘 먹기만 한다면야 무슨 짓인들 못하랴’ 라는 생각으로 기다렸다가 병원으로 가지고 갔다.

2000년 4월 그이의 15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났다. 신문에는 16대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 명단을 소개하면서 “IPU 부의장을 지낸 마당발 박정수 의원은 신병으로 정계를 은퇴했다”고 썼다.

남편의 정치생명이 어이없이 끝나게 되어 안타깝고 허탈했다. 국회 임기가 종료됨에 따라 우리 부부는 아들 직장 의료보험에 부양가족으로 등록되어 5월 31일부터 세브란스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너무 일찍 아들 어깨를 무겁게 만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착잡했지만 성우는 “기분 좋은데요"라며 아버지 손을 잡았다.

그이는 5차 때부터 점점 나약해지기 시작했고 “당신만 아니면 다 집어치우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대장암 치수인 CEA가 500에서 110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이 조금은 희망을 안겨주었다. 나도 5개월이 넘으니까 지쳐가는데 본인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병원에서 항암치료 기간에는 매일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SBS뉴스를 같이 본 후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병실에 남겨진 남편에 대한 연민과 아픔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선 언제나 눈물 밖에 안 나왔다. 성연이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어쩌다가 그런 생활을 27년 만에 다시 반복해야 하다니....

개복 고주파 열처리 시술 (RF)

6월 28일 개복한 후 고주파열처리로 암세포를 태워버리는 수술을 했다. 이종태 박사와 노성훈 박사가 집도했다. 간에 대장암이 전이된 곳이 세군 데였는데 개복을 하고 보니 그동안의 항암치료 덕에 한군데는 없어졌고 두 군데를 열로 지졌다고 했다. 그 외는 간이 생각보다 깨끗하고 항암치료를 두세 번만 더 하면 90%는 끝나게 될 것이라는 이종태 박사와 노재경 박사의 말을 듣고 우리 가족은 기뻐서 눈물이 났다. 29일이 내 생일이어서 그이가 나에게 준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휴스턴 의사는 개복을 했을 때 5센티 정도의 암세포는 RF하기에는 크니까 그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쓴 메모를 주치의에게 몇 달 전에 전달했으나 이종태 박사는 그 쪽지를 못 받았다고 했다. 아마도 도려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호자의 입장에서는 늘 이것이 마음에 걸렸다.

RF한지 두 주일 만에 CEA 대장암 수치가 25가 되었다고 해서 뛸 듯이 기뻤다. 정상인의 수치는 5-10이라고 하니 곧 정상 수치가 될 것만 같아서였다. 피검사 결과 CEA 수치에 따라 일희일비하면서 지내야 했다.

그 후 8차, 9차, 10차까지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이는 열 번의 고통스러운 항암치료와 두 번의 대수술을 견뎌낸 것이다. 다행히 체중도 차차 늘어가고 기분도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