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 가정의 관심사
암 환자가 있는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암을 퇴치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음식에 매달리게 마련이고, 암을 고친 사람들을 찾아다니게 된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이가 암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이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항암효과가 있다는 약이나 음식을 갖고 오거나 추천을 했다.
의사에게 물어보면 어떤 것은 간에 부담이 간다고 하고 어떤 것은 무해무득하나 항암효과는 의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었으니 알아서 하라는 답이었다. 우선 야채물(당근, 우엉, 버섯, 무를 끓인 물), 현미차(현미를 두 번 데려서 섞는 차), 인디안 쑥물, 홍삼차, 아카리쿠스 버섯액을 적당한 시간대마다 한잔씩 환자에게 마시게 했다. 너무 마실 것이 많으니까 그이는 가끔 짜증을 내면서도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인디안 쑥은 성우의 후배인 김종한 변호사 어머니가 산에서 직접 따서 깨끗이 씻어 말린 것을 보내주어서 조금씩 다려서 들었다. 홍삼차는 장동운 장군의 부인이 자기 남편도 대장암 수술을 했는데 홍삼차를 다려 마신다고 해서 시작한 것이다. 아카리쿠스 버섯액은 그이의 연대 선배인 최서면 선생님이 일본에서 보내주어서 오랫동안 복용했다.
그밖에 상명여대의 이왕재 교수는 특별한 곳에서 제조했다는 매실주를, 이영남 관동대 교수는 수녀님들이 특별히 만들었다는 지렁이로 만든 알약을, 한국화약 회장의 모친인 강태영 여사는 현미 등 여러 가지 곡물이 섞긴 잡곡과 전기압력솥을, 동양그룹의 이관희 이사장은 강원도에서 재배한 무공해 야채를 보내 주셨다. 2000년 투병 초기부터 그이가 세상을 뜰 때까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의 신세를 졌다.
소문에 김옥길 전 이대총장께서도 대장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고생 끝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이화여대 후문에서 가까운 김 총장 댁에는 여동생과 김동길 박사가 살고 계셨다. 다행히 여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쩌면 그렇게도 그이와 꼭 같은 케이스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총장도 당뇨가 있어서, 체중이 주는 것도 변비증세도 모두 당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혈변은 치질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병을 키웠다는 것이다. 휴스턴에도 갔는데 항암치료는 받지 않은 것으로 들었다. 김 총장이 식사를 아주 잘 하시는 것을 김옥선 의원이 본지 3개월 만에 부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분은 10년 전의 일이고 지금은 의술이 발달되었으니 내 남편은 다를 것’이라고 자위하며 돌아왔다.
계속해서 많은 분들이 병원으로, 혹은 집으로 찾아와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 많은 분들의 성함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으며 지금도 마음속에 고마움으로 아로새겨 있다. 아마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분들의 위로와 격려가 없었다면 그이도 나도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강성모 린나이 회장은 병실에서 그이를 위해 간절한 기도도 해주었다. 여학교 동기인 정영자는 몇 년 전에 잃은 남편인 황호을 대사가 미국에서 위암을 치료하는 독한 항암약을 이겨내지 못해 빨리 세상을 뜨게 되었다며, 6년이 된 지금도 남편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고 울먹였다. 황호을 대사야 말로 외유내강한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유머감각이 뛰어나서 부부 모임에서 늘 본인은 웃지 않고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모두를 웃기는 소질이 있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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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우정 전 서울여대 교수(1923.-2002.)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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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인이 된 이우정 의원께서는 전화를 하고 “그렇게 선하고 신사적인, 깨끗한 분이 웬일이냐”며 무척 가슴아파 하셨다. 야당시절에도 자기는 “DJ가 대통령이 되면 박 의원을 외무장관 최적격자로 점찍어 놓았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여학교 대선배인 이 의원이야 말로 마음씨가 무한히 곱고 인정이 많을 뿐 아니라 이해심이 깊은 여성인데 그렇게 빨리 가실 줄 몰랐다.
친구 강인숙은 “지금 네가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해. 터널은 끝이 있으니까”라는 말로 위로를 해주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터널의 끝이 어떤 모습일지 불안했고 조바심이 났다.
충격에서 벗어나는 단계
그이는 암 선고를 받은 지 석 달째부터는 서서히 체념상태로 들어가면서 국회에도 참석하고 당 고문회의에도 참여하는 등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나도 초반의 충격에서 조금씩 적응이 되었는지 그이가 혼자 외출을 하면 내 일을 볼 수 있었다.
발병 후 처음으로 3월 23일 부부동반으로 공식행사에 나간 곳이 시흥에서 출마를 앞둔 박병윤 씨의 출판기념회였다. 일본 대사관과 독일 대사관 리셉션에도 둘이서 참석했다.
일본 대사관에서는 외국대사들이 그이를 둘러싸고, 부인들은 내 주변으로 와서 그이가 장관하던 때가 좋았다며 “We miss you"를 반복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날 우리가 일본대사관에 도착했을 때 마침 박태준 총리께서 나오시다가 그이를 발견하고 옆으로 끌고 갔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arrange할 테니 뉴욕에 가서 치료받도록 해. 거기 우리 아들도 있으니까“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진심어린 박 총리의 배려에 감격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날 밤 민관식 의장께서 박정수 내외가 일본대사관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전화를 하셨다. 다닐 수 있다면 식사나 같이 하자고 해서 그 후 이대 후문 앞의 식당 ‘마리’에서 사모님의 특별메뉴로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았다. 그이가 잘 먹어주어서 기쁜 날이었다.
며칠 후 박태준 총리께서 총리공관으로 우리를 초대해주셨다. 원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도 된다고 해서 조성래 회장 부부와 같이 갔다. 세 부부가 오붓하게 다양한 주제를 갖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사모님은 암에는 콩이 좋다며 양평에서 아는 사람이 정성껏 만든 무공해 된장을 주셨다. 이날도 그이의 식욕이 과히 나쁘지 않아서 행복한 날이었다. 나의 행, 불행이 남편의 식욕과 비례되던 시기였다.
그 날 박 총리께서는 지난 선거에서 자민련의 패배에 대해 “연합공천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시며 못내 아쉬워했다. 충청도에서 자민련 공천으로 출마했다가 실패한 김선길 전 해양수산부 장관도 “우리 모두 자민련이 민주당과 거리를 둘수록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유권자들이 자민련을 여당도 야당도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당시 다른 분들도 국민의 정부 2년간 6명의 장관과 총리를 자민련에서 배출하고 여당으로 지내왔는데, 갑자기 야당이 될 수는 없으며 DJ도 그만하면 JP에게 깎듯이 예우했으니 민주당과의 연합공천 카드를 택했어야 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몇 달 후 박 총리 비서관을 통해서 뉴욕의 어느 병원에 예약을 했으니 가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그때는 세브란스에서 치료가 진행 중이었고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경제적 부담 때문인지, 그이는 감사하지만 일단 한국에서 치료를 계속하겠다고 뉴욕행을 포기했다. 그이는 박 총리의 눈물겨운 배려에 늘 고마워했고 나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누군가가 우리를 끔찍이 생각해준다는 사실처럼 행복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뚜렷한 변화는 말과 표정이 없어진 점이었다. 평소에는 그이가 너무 말을 많이 한다고 내가 불평을 한 편이었는데 말이 없어진 것이다.
이관희 동양그룹 이사장댁에서 고 이양구 회장 생신날 늘 모이는 부부들이 함께 했다. 과거에는 그 모임에서 강원용 목사, 이어령 장관, 백영훈 박사와 어울려서 우스개 소리도 하고 큰 목소리를 내곤 했는데 그 날은 조용히 표정 없이 앉아 있었다. 며칠 후 이관희 이사장이 “박 박사가 말을 안 하고 있으니까 내 가슴이 너무 아팠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