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의 마지막 날들
주치의사가 치료를 포기한 이후 나는 밤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먼 길을 왔건만 터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실험 약을 쓰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데 대한 공포심과 불안감은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우리 부부 인생의 마지막 그림은 무엇이 될까? 말없이 누워만 있는 본인의 마음 속에서는 무슨 생각이 오고 갈까? 2000년 한해에 겪은 고통스런 시간도 모자라서 미지의 세상으로 기약 없이 떠나야 하나?
11월 15일, 노 박사가 전화로 CEA가 22→49→150으로, 이번에는 250이 되었다고 전하면서 빠른 속도가 걱정이라고 했다. 체중도 3kg이 줄었다. 성우는 아버지가 너무나 가엾고 불쌍하다며 울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잊고 눈감아버렸으면, 모든 것을 보지 말고 죽어버렸으면 하는 절망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없으면 남편은 누가 간호해주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동반자살 충동을 느꼈다. 아무리 힘든 치료를 해도 승산이 없다면 더 이상의 고통을 받기 전에 둘이 같이 안락사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남편 없이 이 나이에 혼자 남아서 무슨 재미로 산단 말인가? 차라리 사랑하는 남편과 같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깨끗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미국에 가기 전까지 자주 해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아직도 용기가 없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이가 저 세상으로 간 후 그때 죽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때 내게 용기만 있었다면 내 남편을 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고통에서 일찍 해방시켜 주었을 텐데... 성우라는 존재가 나의 용기를 꺾은 주 원인이었다고 스스로 변명하지만 그것도 핑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우리의 비참한 형편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이에게 자녀들을 위해 미국대학교에 보내는 추천서 부탁, 여권 부탁, 비자 부탁, 연구비 신청부탁, 예산증액 부탁 등을 끊이지 않고 해왔다. 그이는 “오죽 절실하면 암 환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락을 했겠나” 하면서 추천서를 써 주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해준다든지 서로 만나게 해주는 일들도 끝까지 해냈다. 남의 일이라도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아무리 귀찮아도 도와주는 그이의 성품은 암에 걸려도 변하지 않았다.
11월 30일, 드디어 우리는 미국으로 떠났다.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유학차 떠난 이래, 두 번째로 살림 보따리를 들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20대에는 학위를 받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고 금의환향했다. 60대에는 남편의 병을 고치겠다는 목표가 있지만, 우리가 그 목표를 달성하고 귀국할 수 있게 될지, 그야말로 기약 없는 여행이었다.
평생 동안 남을 해칠 줄 모르고 선하게 살아온 그이에게 왜 이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나요? 형벌 치고는 너무 지나치지 않나요? 하나님께 아무리 소리쳐도 응답이 없다.
미국, 휴스턴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을 끝내고, 저녁 무렵에 말로만 듣던 휴스턴 비행장에 도착했다. 임병효 총영사 내외, 이제호 박사 내외, 김의신 박사 부인, 장근호 영사 등이 마중을 나왔다. 이재호 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임병효 총영사는 원래 총리실 소속이었는데 그이의 장관시절에 JP 부탁으로 외무부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밤 11시쯤에 미리 예약해놓은 아파트에 도착했다. 이미 임 총영사 부인이 김치, 과일, 야채 등 당장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놓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살뜰히 준비해주어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고마웠고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항상 남에게 베풀며 살아오다가 휴스턴에 도착한 순간부터 남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첫날 밤 우리 둘 다 수면제를 먹고 자리에 들었지만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을 맞이했다. 11월 말이었지만 날씨는 따뜻하고 공기도 맑았다. 환자 신분이 아닌 여행자로 휴스턴을 찾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적인 부담 때문인지 피곤하고 어질어질해 긴장을 풀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살림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임 총영사 부인과 장근호 영사 부인의 도움이 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이 임 총영사 내외를 만나게 된 일이었다. 독실한 교인이며 마음씨가 비단 같은 부인은 상대방의 아픔을 미리 헤아릴 줄 아는 속 깊은 젊은이였다. 주사를 맞고 온 날이면 부인이 보내준 닭죽을 그이는 즐겨 먹었다.
우리가 1년 3개월간 살게 된 3층짜리 아파트 단지는 병원에서 가까와 한국에서 온 암환자 가족이 많이 살고 있었다. 지은지 오래 되어서 한국 아파트보다도 시설이 옛날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수도 손잡이도 one touch가 아니고 화장실 물소리도 폭포소리 같이 크며 보일러 도는 소리는 더욱 컸다.
Park at Vanderbuilt라고 부르는 우리 아파트 단지 복판에는 커다란 호수와 두개의 분수가 있어서 그 주변을 한번 도는데 평균 7분이 걸린다.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운동을 권하기 때문인지 아침에 밖을 내다보면 한국 환자들이 시간대마다 다르게 호숫가를 걷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새 아파트에서 연어를 브로일러에 넣고 굽는데 연기가 조금 났다. 그런데 갑자기 고막이 찢어질 듯 한 사이렌 소리에 기겁을 하고 어쩔 줄 몰라 왔다 갔다 하는데 누워있던 그이가 나와서 창문을 여니 그 소리가 멎었다. 천정에 있는 화재 센서가 작동한 것이다. 그 후에도 두 번이나 그런 소동이 있어 결국 관리실에 연락해서 꺼놓게 만들었다
휴스턴에 도착한지 나흘째, 오전 10시 김의신 박사로부터 소개받은 종양내과의 브라질 출신 호프 (Hoff) 박사를 만났다. 그이의 주치의가 된 호프 박사는 당뇨가 조절이 안 되면 치료에 착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쥐나 개한테 실험하는 약을 몇 명의 대장암 환자들에게도 실험중인데 바로 그 실험약 TAS-102를 그이에게 사용할 계획이니 승낙서에 서명을 해오라고 했다.
대충 짐을 푼 다음 그이가 잠든 사이에 승낙서라는 서류를 읽어보니 ‘모든 부작용도 감수 한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겁이 났다. 머나먼 객지에까지 와서 실험용 약의 부작용으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그이에게 좀 더 기다렸다가 결정을 하자고 권했다.
다음날 그이를 따라 병원에 갔다. 예약시간에 도착해도 30~40분간 기다리고, 이름을 불러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가서 간호사가 온갖 질문을 한 후 또 30분을 더 기다린 후, 레지던트가 들어와서 꼭 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또 약 20분 정도 기다리자 주치의가 들어왔다. 성격이 급한 나는 참을성이 없어서 일어났다 앉았다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렸고 그이는 아무런 내색이나,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호프 박사가 들어와서 전날 밤 일은 대 실수였다며 사과를 했다. 실은 자기가 주사도 처방했는데 주사를 놔주지도 않고 주사약 값을 받게 했다며 환불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에 오자마자 받은 암센터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았다.
그 이후 1년 3개월간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해졌다. 김의신 박사에게 MD Anderson Cancer Center가 아니라 MD Anderson Waiting Center라고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진담 섞인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에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퍼즐을 즐기고 있어서 그 모습에 감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