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 젊음의 혈기로 발산될 때 그 사람은 외향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 열정이 내면으로 향할 때 그 사람은 외향적인 성격에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되돌아온다. 나는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런데 한 때의 젊은 혈기 때문에 외향적으로 변해 광화문거리패들과 어울려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 가슴 저 밑바닥에 숨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랑을 알기 시작하면서 ‘열병’처럼 가슴앓이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젊은 혈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대학 2학년 무렵, 나는 가슴 속에 뜨거운 불덩어리를 안고 있었다. 나는 그 무엇으로도 그 불을 잠재울 수 없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휴화산처럼 나는 가슴 속에 뜨거운 불덩어리를 안고 몸부림 쳤다.
바로 그 무렵, 내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당시 나는 서울 성북구 돈암교 누님 집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녔다. 누님의 딸이 돈암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어느 날 가정방문을 온 조카의 여자 담임 선생님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조카를 통해 알아보니 이름은 ‘김영주’였고 나이는 나보다 네 살 아래였다. 서울사범학교(현 교원대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된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여선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매일 돈암초등학교 골목을 배회하였다. 여선생이 학교와 집을 오가는 골목을 알아두고서는 우연히 마주치는 것처럼 하면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골목길을 지킨 지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오른쪽 손을 들어 여선생에게 아는 체를 하였다.
“누구시죠?”
여선생은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카의 이름을 댄 후 뒷머리를 쓱쓱 긁으며 말했다.
“내가 그 애 외삼촌입니다.”
“아 며칠 전에 가정방문 갔을 때 뵈었지요?”
다행히도 여선생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우리는 곧잘 광화문 황정유까지 진출하여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 커피숍은 이른바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한 달도 되지 않아 나의 대학 친구들도, 광화문에서 껄렁대는 거리패들도 우리가 ‘연인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무렵 나는 될 수 있는 한 거리패들과 어울리는 자리를 피하면서도 광화문은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약속시간에 맞춰 황정유에 나갔는데, 여선생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자, 나는 그녀가 사는 보문동 집으로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도 딸이 나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계셨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 한분 밖에 안 계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때까지도 수시로 광화문 거리패들과 어울려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도 어떤 녀석이 주목에 눈을 다쳐 안대를 하고 다녔으니, 그녀로부터 그런 애기를 들은 어머니가 가만히 계실 리 만무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간의 상황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대를 한 얼굴로 여선생을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자 그녀의 어머니가 나오셨다.
“돌아가세요.”
어머니는 첫눈에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차갑게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행동은 곧 문이라도 닫아 걸 기세였다. 나는 여선생이 방안에 숨어서 그런 광경을 엿보고 있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정말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완강함 때문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그날 여선생을 만나지 못한 채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골목길을 벗어나야 했던 나의 마음이 무척 쓰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여선생이 광화문 황정유에 나타났다. 그녀를 생각하며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음악에 심취해 있던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수척해진 모습에 놀랐고, 잠시 후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가방을 보고 더욱 놀랐다. 집은 나온 것이 분명하였다.
“어떻게 된 일이오?”
나는 여선생을 위하여 커피를 시킨 후 물었다.
“......”
“무슨 일이 있었나요?”
“......”
여 선생은 좀처럼 나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미아리에 조그만 방을 얻어, 이를테면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살림살이라고는 냄비 하나에 숟가락 두 개가 전부였다. 돈이 별로 없는 우리는 밀가루를 사다가 수제비를 끓여 먹기도 하였다.
처음 수제비를 끓이던 날, 우리는 냄비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 물과 함께 끓였다. 그런데 다 끓고 나서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수제비가 아니라 걸쭉한 풀이 되어 있었다. 먼저 물을 펄펄 끓인 후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물과 함께 반죽을 넣고 끓였으니 수제비가 될 리 만무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풀이 된 수제비를 가운데 놓고 옷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수제빌 처음 꿇여 보거든요.”
여선생은 수줍게 웃으면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그날 우리는 배가 고픈 김에 수제비가 아닌 걸쭉한 풀떼기를 숟가락으로 퍼 먹었다. 양념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면 어떤 음식도 그렇게 맛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참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던 여선생의 눈에서 눈물이 그릇 속으로 두어 방울 뚝 떨어졌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왜 그래요?”
나는 혹시 여선생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쩔쩔 매며 물어보았다.
“집 생각이 나서요... 어머니가 걱정하실 것 같아서...”
여 선생은 손에 쥐고 있는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나는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교육자 집안에서 엄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며, 이제까지 가족과 떨어져 살아본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그녀가 없어진 것을 보고 어머니가 걱정하며 찾고 있을 생각을 하니, 내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만 참아요. 내가 어머님을 만나 우리의 결혼을 허락받겠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용서해주시려고 할까요?”
여선생은 어깨까지 들먹이며 울었다. 나는 그날 밤 그녀는 달래느라 정말 진땀을 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수제비 만드는 것을 실패한 후 우리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제대로 된 방법을 배워 썩 훌륭한 수제비를 끓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거의 밥보다는 밀가루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보냈지만, 우리의 사랑은 뜨겁게 불타올랐고, 그 사랑이 녹아 있는 것이라면 먹는 것이 시원찮고 잠자는 곳이 누추하더라도 최상급에 속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광화문거리패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공부에 몰두하였다. 망나니처럼 뛰놀던 젊은 날의 혈기가 이젠 사랑의 열병으로 옮겨 붙으면서, 그제서야 제대로 된 인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랑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난 직후인 5월 19일 서울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3일간의 동거가 오히려 승리자의 바뀌어 양가의 어른을 모신 자리에서 정식으로 부부가 된 것이었다.
바람의 세월 속에서 나를 건져 올려 안락한 가정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순전히 아내의 사랑 덕분이었다. 만약 그 시절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방황은 더 길어졌을 것이고, 내 인생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지금도 첫사랑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내가 올바른 길로 갈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