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이강석이 따로 없다 (13화)

이 세상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태양을 향해 머리를 든다. 태양은 절대적인 권력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태양에게서 생명을 얻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권력이 한때 대통령에게로 집중되던 때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다. 물론 지금도 대통령은 권력의 구심점이다. 그러나 옛날보다 많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우연히 박정희 대통령 가까이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절대 권력이 어떤 것인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1972년 봄, 나는 무용단원 20여명과 함께 진해 벚꽃놀이 행사에 간 적이 있다. 그 행사의 일환으로 해군부대에서 가든파티가 열렸는데,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외교사절, 미8군 관계자들, 국내 안보 및 외교와 관계된 장차관들 등 200여명이 참석해 있었다.

가든파티에서 무용단 공연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파티가 열리기 전부터 분주하게 공연무대 안팎을 오가며 공연준비에 바빴다. 당시 한국민속예술단은 지금의 국립무용단 전신으로 한국무용이 주된 레퍼토리였다.

한참 공연이 진행될 때 나는 무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혹시 대통령 앞에서 단원들 중 누군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단원들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공연장에서는 뜻하지 않은 돌발사건이 많이 일어날 수 있었다. 갑자기 무대가 무너진다거나 스피커 고장으로 오디오가 잘 들리지 않는다거나, 무대 위로 누군가가 뛰어올라올 수도 있었다. 요즘 텔레비전의 생방송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공연 중 누군가 실수를 하더라도 그대로 진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정인형 경호처장이 나에게로 헐레벌떡 뛰어와 급히 말했다.

“각하께서 부르시니, 빨라 따라 오시오!”

노심초사하고 있던 나는 뭔가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해서 잔뜩 겁을 집어 먹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통령이 직접 나를 부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나는 그저 공연담당 공무원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대통령과 개별적으로 특별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통령 내외와 외교사절 및 내빈들이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객석으로 뛰어갔다.

“각하, 불러왔습니다!”

경호처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나를 보더니 손짓하여 부르며 가까이 오라고 했다.

조상호 의전수석이 재빨리 눈치를 알아채고 내가 앉을 의자를 가져다 대통령 옆에 놔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의자에 가서 앉았다.

“지금 어디서 근무하고 있나?”
대통령이 갑자기 내게 물렀다.

“네, 문공부에서 근무합니다.”

나는 그 제서야 박정희 대통령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 근무할 때 나는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구내 이발소에서 같이 이발한 적도 있고,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소주를 마신 적도 있었다. 대통령은 아마 내가 무대 가까이에서 왔다 갔다 할 때 그 기억을 되살려낸 모양이었다.

어찌됐든 나는 대통령 바로 옆에 앉아 있게 되었고, 바로 일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저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을 맡고 있나?”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공연과에서 주로 무대공연을 맡고 있습니다. 지금 공연 중인 한국민속공연단을 인솔하고 왔습니다.”
“응, 그래?”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계속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에 뮌헨올림픽 개회식에 한국민속무용단 농악팀이 참여하는데, 거기 인솔자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대에서 공연 중인 한국민속무용단이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수준의 팀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뮌헨올림픽 이야기까지 꺼냈다. 그랬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육영수 여사가 한마디 했다.

“이번에 나갈 때 의상을 최고급품으로 만들어 입히도록 하세요.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이니 신경을 많이 써야 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단원들에게 최고급 의상을 입히려면 예산을 그만큼 확보해야 하는데, 당시만 해도 예산 받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데는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이번 뭰헨올림픽 공연단에게 최고급 의상을 입히도록 내가 장관에게 지시를 하지.”

대통령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외교사절들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약 30분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내외와 나눈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였다. 대통령은 공연이 끝나고 나서 내게 악수를 청하였다.


▲ 가짜 이강석 사건의 재판기사 (동아일보 1957. 10. 23.) 가짜 이강석 사건은 1957년 8월 30일에 한 청년이 경주 경찰서에서 자신이 '이승만의 양아들인 이강석'이라고 사칭한 사건을 말한다. 자신이 이강석이라고 자처한 청년은 경주 경찰서장의 극진한 대접과 경호차까지 제공받아 경주를 관광하고서 영천 경찰서에서도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3일 만에 가짜로 들통나서 체포되었다.

헬리곱터를 타고 대통령이 가든파티장을 떠나자 김용식 외무부장관을 비롯하여 파티에 참석했던 고관들이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나를 쳐다보는 그 고관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박정희 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판단하여 서로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공부 일개 사무관에 불과한 나를 귀공자 대하듯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속으로 가짜 이강석이 따로 없구나 하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청와대 출입기자가 문공부로 나를 찾아왔다. 평소 안면이 있는 사진기자였는데, 그는 불쑥 내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내가 대통령 내외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찍었어요?”
나는 사진을 받아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중에 필름을 확인해보니 찍혀 있더군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사진이 아니니 잘 보관해 두시오.”

사진기자는 내가 미처 고맙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을 들어 보이며 급히 가버렸다.

내가 보아도 사진 속의 나는 귀공자처럼 나왔다. 왼쪽에서부터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내가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사진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한때 내 책상 유리판 밑에 끼워두고 있었는데, 사무실을 이전할 때나 서류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없어져버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사건으로 인하여 나는 여러 번 정부 고위층들로부터 인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