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알려 준 부고소식 (15화)

또 한 가지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서는 단원 중에 한 명이 여권을 분실하여 비행기를 타지 못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비행기 탑승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단원 한 명이 발을 동동 굴렀다.

“여권이 없어졌어요!”

그 단원은 가방을 뒤지고 호주머니를 뒤지고 안절부절 못하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여권을 각자 개인에게 밭긴 것을 후회하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여권 50여개를 묶어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잊어버릴 염려가 없었다. 그런데 취리히에서 각자 여권을 나누어 주고 나서 비행기 탑승 시간이 남아 집으로 엽서를 붙이게 했던 것이 불찰이었다.

우리 단원들은 각자 흩어져 공항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화장실을 확인 하는 등 난리를 피웠다. 그래도 여권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때 문득 나는 우체통을 발견하였다. 그 순간 우리 단원이 엽서를 붙이면서 여권까지 함께 우체통에 넣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나는 급히 공항 관리실로 뛰어가 우체통 열쇠를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공항 우체통을 열어보니 엽서 더미 속에서 여권이 나왔다.

다행히도 그때까지 비행기가 이륙하지 않아 단원 50명 모두 탑승할 수 있었다. 만약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여권을 찾지 못했다면 한 명 때문에 50명 단원 모두가 공항에서 날밤을 새울 뻔 했던 것이다. 호텔 예약도 안 되어 있는 상태고, 다음 비행기까지 기다리려면 공항 대합실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돈가방 사건이나 여권분실 사건 모두 우리가 해외여행을 한 경험이 부족하여 일어난 해프닝이지만, 50명 일행 중 인솔자였던 나만큼 가슴을 태운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공적인 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개인이 희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우선 공직이라는 무거운 책임이 부과되어 있는데다 여러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이 가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조오제 씨는 돈가방 사건으로 나를 50년 감수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또 사람으로서 그에게 못할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불효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유렵 공연을 시작한 지 2개월 쯤 지났을 때 조오제 씨에게 전문이 하나 날아왔다. 전문 내용을 살펴보니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전문을 들고 한참 동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는 최종적으로 해외공연이 다 끝날 때까지 그에게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알려주지 않기로 하였다.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우리 단원들의 경비를 총괄하던 조오제 씨가 도중에 귀국을 하게 된다면 해외공연 일정을 제대로 마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당분간 그의 아버지 부고 소식을 묻어두기로 하였다. 어쩌다가 조오제 씨에게 알려질지라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나와 단장 정도만 알고 있는 비밀로 해두었다.

그러나 나는 해외공연 체류기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오제 씨 얼굴만 보면 죄를 진 기분이었다. 몇 번인가 그에게 아버지 부고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장례의식이 끝난 뒤였는데도, 그가 너무 충격을 받아 공연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끝내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동, 아프리카를 거쳐 해외공연 예술단을 동남아시아에 도착하였다. 동남아시아만 해도 동양권이라 우리 정서와 뭔가 통하는 게 있었다. 서양이나 중동, 아프리카와 달리 친근감이 있었던 것이다. 동양사람들은 정서적으로도 크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 1972년 뮌헨올림픽 직후 한국민속예술단원들과 함께 한 세계 순회공연 / 당시 예술단의 활약에 대해 뉴욕타임스 등 세계 유수의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사진은 뉴욕타임스의 기사)

“우리 공연을 마무리 할 때 각 나라 민요를 배워 관객과 함께 부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요?”

피리를 부는 박범훈 씨가 제의하였다. 그는 피아노도 수준급이었는데, 자신이 직접 각국 민요를 단원들에게 가르쳐주겠다고 하였다.

단원들은 모두 그 제안에 동의하였다. 오랜 기간 여행에 지쳤지만, 단원들을 동남아시아 각국을 돌면서 그 나라 말로 된 민요를 배우느라 피땀을 흘렸다. 박범훈 씨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발음도 잘 되지 않는 낮선 말을 외며 그야말로 스파르타식으로 밤을 지새가며 연습을 하였다.

각국 나라 말이 익숙지 않은 단원들은 손에 들고 있는 소고에 한국말 발음으로 가사를 써서 민요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렇게 열성을 다 하여 민요를 부르니, 관객들의 호응도가 아주 높았다. 발음은 시원치 않았지만, 곡은 정확하게 배웠는데, 간혹 단원들이 공연 도중 곡을 잊을 경우 관객들이 이어서 불러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감격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는 우리 예술단과 관객이 하나로 어우러져 공연이 끝난 후에도 얼싸 안고 그 나라 민요를 부르는 등 나라와 민족을 뛰어넘어 한마음이 되는 화합의 장을 연출하였다.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졌기에 그 감동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홍콩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외공연 예술단의 4개월 일정은 모두 끝났다. 해외에서의 마지막날 자축연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조오제 씨가 부친상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정식으로 전하였다. 벌써 두 달 가까이 된 일을 뒤 늦게 전하게 된 까닭을 설명하자 단원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나는 조오제 씨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용서를 빌었다.

“너무 늦게 알려줘서 미안합니다. 이번 해외 공연은 건국이래 처음으로 한국 예술단이 국위선양을 하는 막중한 임무라, 팀워크를 깨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니 용서하십시오!”

조오제 씨는 덥석 손을 잡으며 공직에 있는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흔쾌히 내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날 예술단원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십시일반으로 부조금을 거둬 조오제 씨에게 주고, 단체로 묵념을 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 이미 동남아시아에서 예술단이 각국 민요를 배워 합창을 하는 등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는 보고가 정부 부처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예술단의 공연이 성공적이었다”는 보고를 하였던 것이다.

곧 정부에서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건의로 50명 예술단 전원에게 훈장을 주기로 하였다. 국민포장에서부터 석류장 등 3등급으로 나누어 시상을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공연사상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나 역시 사무관의 신분으로 받기 어려운 국민포장을 받았으니,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1972년에 해외공연을 다녀 온 예술단 50명 전원으로 구성된 <72회> 모임을 만들어, 회장으로 그 모임을 주도하였다. 지금도 매년 25명 정도가 모임에 참석하여 그때의 감격을 회고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