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9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근무를 마치고 서울 예술단 단장으로 갔다. 당시 강남 동아극장 4층에 ’88서울예술단이 있었는데, 국가적인 예술단체 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 ’88서울예술단은 88서울올림픽에 대비하기 위하여 1986년에 출범한 예술단체였다. 그보다 한 해 앞서 1985년에 남북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북한 예술단이 남한에 와서 공연을 하고 남한 예술단은 북한에 가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북한에는 만수대예술단, 피바다가극단 등 당국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류급 에술단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북한에 가서 공연한 남한 예술단은 임시로 급하게 조직한 단체로, 여러 가지 점에서 미흡한 점이 많았다.
아무튼 북한 예술단에 자극을 받은 남한에서도 국가적 규모의 일류급 예술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마침 88서울 올림픽도 다가오고 하여 그 준비과정에서 ’88서울예술단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었다. 초대 단장은 차범석 씨로, 처음에는 국가적인 지원도 많았고 운영도 아주 잘되었다.
그러나 88올림픽이 끝나고 나자 ’88서울예술단은 한국방송광고공사로부터 나오는 지원금으로 운영하게 되었으며, 예술단 단장도 한국방송광고공사 이사로 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예술단 지원금이 나왔으므로 나는 매주 월요일 아침 광고공사가 있는 프레스센터에 가서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서울예술단은 단순히 지원금을 받는 공보처 산하였기 때문에,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저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였다. 누구 하나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88서울예술단은 한마디로 비전도 없고 철학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나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엿다. 우선 예술단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예술은 무용지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당시 ’88서울예술단에는 뮤지컬만 있었는데, 나는 무용단까지 만들기로 하였다. 내가 무용단을 만든 것은 해외진출을 하기 위해서였다. 뮤지컬만 가지고는 해외에 나가 큰 호응을 받을 수 없고, 한국의 전통민속예술을 선보이는 무용단이 있어야만 해외공연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내가 1972년에 예술단 50명을 이끌고 전 세계 24개국을 순회공연하면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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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서울예술단 초대 단장이었던 차범석 선생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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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단은 국내 공연보다 해외 공연을 많이 다녀야 합니다. 기존 예술단에는 뮤지컬만 있지 무용단이 없습니다. 한국의 뮤지컬 수준으로는 해외 공연에서 호응을 얻기가 쉽지 않고, 또 한국을 알리는 데 별로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민속무용단이 필요합니다.”
나는 한국방송광고공사 이사회에 참석하여 이렇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갖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므로 실망하지 않았다. 그 후 나는 계속해서 끈질긴 설득작전으로 나갔다.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나는 우직한 데가 있었다. 한번 결정한 일은 그것이 관철될 때까지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이러한 끈질긴 설득 끝에 나는 한국방송광고공사로부터 민속무용단 결성 허가를 얻어냈으며, 그에 필요한 지원금을 받아내는 데도 성공하였다.
무용단이 갖추어지자 나는 ’88서울예술단을 이끌고 미국 공연에 나서기로 하였다. 국위선양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왜 민속무용단이 필요한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공연을 기획하기 전부터 무용단에게 최종적으로 연습을 시켰다.
미국 공연 허가를 받으라고 하는데, 당시 최병렬 문공부장관은 ’88서울예술단의 실력을 별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로 바쁜 장관 대신 박신일 해외공보관장을 초청하여 무용단 시연회를 가졌다.
“관장님! 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나는 자신 있게 물었다.
“대단합니다. 무용단을 결성한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들었는데, 어느새 그렇게 연습을 많이 했습니까?”
박신일 관장은 적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민속 무용은 대단한 문화재산입니다. 국위선양이라는 데에 민속무용만한 것도 드물것입니다. 이번에 미국공연을 가게 되면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장관님께 잘 좀 말씀해주십시오.”
내 말에 박신일 관장은 굳은 악수로 약속을 대신했다.
곧 박신일 해외공보관장은 ’88서울예술단의 무용 시연회를 본 감동을 문공부장관에게 전하면서, 미국 5개 도시 순회공연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 건의는 즉각 받아들여졌고 ’88서울예술단은 뮤지컬은 빼고 전통무용만 거지고 미국 5개 도시 순회공연을 하기로 하였다. 당시 안무는 국수호 씨가 맡았으며, 피나는 연습을 거친 후에 미국 순회공연 길에 올랐다.
이렇게 해서 ’88서울예술단은 워싱턴, 뉴욕, 시카고, LA, 샌프란시스코 등 5개 도시의 순회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당시 미국의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지 등 각계 신문에서 88서울예술단의 공연기사를 대서특필하였다. ‘동양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큰 타이틀로 뽑아 한국의 민속무용을 큰 사진과 함께 내보냈다. 그러자 국내 신문에서도 미국에서의 서울예술단 활약상을 기사화하기 시작하였다.
88서울예술단이 미국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자, 국내에서는 대대적인 환영으로 맞아주었다. 나는 1972년도에 예술단이 해외공연을 마치고 귀국할 때 받았던 감회를 되새기며 다시금 눈시울을 붉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