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장관과 서울예술단 (26화...

1989년 12월 정부는 문화공보부를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초대 문화부장관에 문학평론가 이어령 씨를 임명하였다. 이때 '88서울예술단은 문화부 소속으로 가는 것이 당연한데도 공보처 소속으로 되어버렸다. 당시 88서울예술단 운영비가 나오던 한국방송광고공사가 공보처 소속이 되면서 자연히 따라가게 된 것이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예술단이 공보처에 소속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문화부 소속으로 남아야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은가? 우선 나는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과 위원들을 설득하기로 하였다. 위원회가 열렸을 때 나는 88서울예술단만큼은 문화부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광고심의윈들에게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토로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운영비가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나간다는데 있었다. 다시 말하면 운영비는 공보처 산하에서 받고, 소속은 문화부로 될 경우 행정상의 절차가 복잡하다고 해서 88서울예술단을 그대로 공보처 소속으로 놔둔다면 예술활동을 하는데 그만큼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보처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데 운영비만 계속 지출되니 88서울예술단은 미운오리새끼처럼 될 것이 뻔했다.

한국방송광고공사 이사회에서는 88서울예술단이 문화부 소속으로 옮겨가는데 큰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만약 88서울예술단이 문화부 소속으로 될 경우, 문화부에서는 예술단을 지원할 예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편법이라도 써야지요. 일단 예술단을 문화부 소속으로 두고, 예산은 그대로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하면 될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나의 주장에 한국방송광고공사 이사진은 찬성하였다. 그러나 공보처장과 문화부장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성사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나는 먼저 공보처장을 찾아가 설득을 한 후 다시 문화부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장관이 매우 바빠서 면담 시간을 마련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 문화부 비서진들의 대답이었다. 한 달 동안 기다렸지만 면담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 그때는 본회의가 열릴 때여서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문화부와 관련한 질의에 답변하기 위해 국회에 나가 있었다.

나는 국회로 달려갔다. 마침 국회 복도에서 전부터 알고 지내던 신경식 의원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국회 문공위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본회의실에 가서 마음대로 이어령 장관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경식 의원에게 무조건 이어령 장관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잠깐 기다려 보시오.”

신경식 의원이 본회의실로 들어가고 나서 얼마 있으려니 이어령 장관이 복도로 나왔다. 누가 자신을 찾는지 몰라 한참동안 복도 양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언뜻, 내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설마 내가 면담을 요청했다고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장관님! 접니다. 제가 뵙자고 요청한 것입니다.”
나는 이어령 장관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어, 그래요?”
“죄송합니다만, 제게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나는 이어령 장관이 바쁘다는 핑계로 다시 본회의장으로 들어갈까봐 내심 걱정을 하며 그의 앞으로 바짝 나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 서울예술단이 재단법인으로 바뀐 뒤 현판식을 가지며 / 왼쪽부터 당시 이민섭 국회 문공위원장, 필자, 조경희 예총회장, 이어령 문화부장관

나는 먼저 장관을 만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문화부에 면담요청을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국회로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한 후 88서울 예술단을 문화부 소속으로 옮겨달라고 청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복도에서 이야기하기는 곤란하고......”

이어령 장관은 나를 의원식당으로 안내하였다. 그리고 20분간 나와 면담을 하였다. 그때 나는 미리 만들어가지고 간 미니 차트를 꺼내놓고 간략하게 88서울예술단의 현황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 예술단도 예총이나 예술의 전당과 같은 시스템으로 문화부 소속으로 되게 해주십시오. 이 기회에 재단법인으로 등록해서 문화부가 우리 예술단의 지도감독청이 되도록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아주 짧은 시간에 할 말을 다했다. 미니 차트 등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설명이 가능하였다.

“구구절절 옳은 얘기로군! 내가 신중히 검토해보도록 하겠소.”
이어령 장관은 내게 악수를 청하였다.

다음 날 문화부 국장회의 때 내가 건의한 사항들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 회의석상에서 이어령 장관은 88서울예술단을 문화부 소속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중에 내가 문화부 어느 국장을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그날 국장회의에서 이어령 장관은 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이종덕 단장은 자기 일을 위해서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내게 찾아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강한 추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점은 배워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며칠 후 문화부로부터 이어령 장관이 88서울예술단으로 떠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직접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오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무용단을 집합시켜 이어령 장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무용공연을 하였다. 아니 무용공연이라기 보다 그동안 연습한 것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무대가 아닌 연습실에서 하는 공연이니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실 내가 이어령 장관에게 무용 공연을 보인 데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무용 공연을 같이 보면서 나는 장관에게 넌지시 말했다.

“장관님, 보시다시피 연습실이 비좁습니다. 예술단을 예술의 전당으로 옮겨주십시오.”
“생각해봅시다.”

공연을 보고 난 이어령 장관은 매우 흡족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 곧 나는 문화부로부터 예술단의 재단법인 신청을 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며, 1개월 내에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그 얼마 후 88서울예술단은 이어령 장관의 주선으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하실로 옮기게 되었다. 680여 평 공간에 사무실과 대ㆍ중ㆍ소 연습실 3개를 만들었으며, 예술단도 개편하여 뮤지컬ㆍ무용ㆍ가무악(사물놀이와 창) 3개 파트로 확대 개편하였다.

1991년에는 예술단 이름도 ‘88서울예술단’에서 ‘서울예술단’으로 바꾸었다. 1985년에 이미 서울예술단을 만들어 북한공연을 간 바 있어서 당시 안기부에서는 혼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명칭을 바꾸는 데 대하여 별로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1985년 임시로 예술단을 만들어 북한에 있던 ‘서울예술단’을 부활한다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적극 주장하여 그 이름을 관철시켰다. 새 이름으로 거듭 태어난 서울예술단은 조직의 강화를 위하여 조경희 씨를 이사장으로 모셔왔으며, 나는 상임이사 겸 단장을 맡았다.

그리고 3년 후에는 조경희 씨 후임으로 내가 이사장이 되었다. 이사장이 된 나는 서울예술단의 제2 창단을 주도하면서 단원도 50명에서 90명으로 늘리는 등 예술단을 활성화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