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통하고 정의는 승리한다 ...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좌우명처럼 삼고 있는 것은 ‘진실은 통하고 정의는 승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성격이 삐뚤어진 사람도 마음 속의 진실을 보여주면 그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다. 어떤 싸움도 정의를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무릎을 꿇게 되어 있다. 진실과 정의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

1997년 예술의 전당 노조가 임금 인상과 인사권 참여 등을 내걸고 농성에 돌입하였다. 예전부터 예술의 전당 노조는 문화계에서 강성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역대 사장들이 노조 때문에 3년의 임기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나간 사례가 많았다.

나는 1995년 예술의 전당 사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사고 없이 제대로 임기를 마치고 나가겠다는 결심하였다. 그렇다고 노조가 단체행동에 돌입했다고 해서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1997년 당시 예술의 전당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임금인상과 인사권 참여 외에 또 있었다. 그때 예산 중 5천만 원이 남아 있는데, 그것을 사원 개인에게 각각 나눠달라는 것이었다. 언제나 예산에는 예비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예비비는 만약을 대비하여 남겨두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노조는 그 예비비에서 남은 돈 5천만 원까지 사원들 몫으로 달라는 것이었다.

예술의 전당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므로, 공연장 앞에서 노조원들이 시위를 하는 것은 이미지상 좋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한 건물 내에서 시위를 하도록 권유하였다. 곧 총 140명 가운데 100여명의 노조원들은 4층 컨퍼런스 홀에 모여 농성을 허면서 파업결의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파업까지 가서는 안 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겠다.”
사장에서 부장, 임원 등 간부들과 대책회의를 하다말고 나는 벌떡 일어섰다.

“사장님! 지금 농성장에 가시면 안 됩니다.”
간부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나는 불끈 솟아오르는 화를 참으며 주저앉았다.

“지금 노조는 예전보다 훨씬 강성입니다. 잘못하면 봉변을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단독으로 가시면 절대 안 됩니다.”

간부들은 노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리고 나 혼자 농성장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정면 돌파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잠시 후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간부들을 그대로 앉혀 놓은 뒤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당시 사장실은 3층에 있었기 때문에 농성장까지 가려면 한 층 더 올라가야만 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러나 뚜벅뚜벅 내 발자국 소리가 귀에 확실하게 들릴 정도로 다리에 힘을 주어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 예술의 전당 역대 사장과 간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내가 농성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창 열띤 토론을 벌이던 노조원들이 갑자기 숨을 죽였다. 예고도 없이 사장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그들은 모두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노조원들은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단상으로 향하면서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들 하나하나와 눈빛을 마주쳤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여러분 내가 딱 30분만 이야기 할 시간을 주십시오.”
나는 노조원들을 향하여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노조위원장은 내 청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나는 노조원들의 상기한 표정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둘러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여기 있는 노조위원장 이상으로 노조원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식구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한 식구인데 이렇게 서먹서먹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선 표정부터 풀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해봅시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노조원들을 둘러보고 눈을 마주 치면서 그들의 양심에 호소를 하였다. 그러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긴장된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으면서 눈빛들이 점점 부드러워졌던 것이다.

“우리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예술을 사랑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수준 높은 지식과 예능을 겸비한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수준 높은 예술의 창조자들이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노조 협상도 수준 높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점점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따져볼 때 노조원들의 요구가 너무 지나친 것은 비판을 각하고,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들어주겠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협상은 어느 한쪽이이기고 어느 한쪽이 지는 승자와 패자의 결전장이 아닙니다. 양측이 모두 한 단계 진일보 하는 쪽으로 가면서, 서로 약간씩 양보하는 미덕을 지닌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협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러분들과 협상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우선 내가 진정 우리 예술의 전당 사장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부터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협상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나는 진지하게 노조원들을 둘러보았다. 조금씩 술렁이는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를 가하여 나는 폭탄선언을 했다.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이 나를 불신임한다면 나는 당장 떠날 용의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나를 평가해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나는 노조위원장에게 백지를 달라고 했다.

노조위원장이 백지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그것을 농성장의 모든 노조원들에게 골고루 돌렸다.

“나의 신임을 묻는 것입니다. 나를 신임하는 사람은 ○표, 불신임하는 사람은 ×표를 해주십시오.”

현장에서 실시하는 직접 비밀투표였다.

백지를 나누어 준 뒤 나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이미 노조원들의 변화된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최악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반반은 되겠지 싶었다.

투표결과 찬성 49, 반대 11표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기권이었다. 이렇게 해서 노조원들의 농성은 끝이 났다. 그 자리에서 농성을 풀고 각자 본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뒤부터 예술의 전당 노조는 명분 없는 농성을 하지 않았다. 건전한 노조활동을 통하여 노조원들 간의 친목을 다지는 쪽으로 활성화 된 것이었다.

1998년 4월 나는 예술의 전당 사장의 임기를 마치고 사단법인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으로 가게 되었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사장 이임식이 열렸는데, 나는 노조원들로부터 많은 꽃다발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노조원들이 두 줄로 서서 그 가운데로 지나가는 나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송해주었다. 어떤 노조원은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떠나는 것을 서운해 하기도 하였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