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무가 큰 그늘을 드리운다 (...

어려서부터 나는 나무를 좋아하였다. 나무는 의연한 자태를 가지고 있어 좋다. 나무는 누구 앞에서 뽐내는 법이 없고, 다투어 다른 가지보다 먼저 자라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자연의 순리에 따르며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 간다.

하늘과 땅 사이에 직립하는 것은 사람과 나무뿐이다. 나무는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숙이 내리고,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빨아올려 가지를 키운다. 그 가지의 뻗어 오르는 기운은 하늘을 향해 이상향을 불태우는 자태와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나무는 서로 통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늘 강조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큰 나무가 되어라. 남자는 저 큰 나무와 같이 튼튼하고 폭이 넓어야 한다. 남을 위해 큰 일을 할 줄 알고,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라도 참아야 하며, 반듯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성실하고 진실하게 상대방을 대해야 한다. 우리 선조인 오리 정승은 정적들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던 분이시다.”

이 말씀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내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아버지의 그 말씀 때문에 어려서부터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말씀을 내 마음속의 화분에 심어놓고 마치 나무를 기르듯 물을 주고 가꾸면서 이제까지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지금 생각할 때 나는 아직 큰 나무가 되지 못하였다. 다만 나는 아직도 내 마음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나무에 열심히 물과 거름을 주고 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나는 큰 나무가 되겠다는 욕심보다는 단순히 나무를 기른다는 행위에 만족한다.

나는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아버지 이완규, 어머니 김도영)은 먼저 딸 셋을 낳고 나서 마지막으로 나를 낳았다. 이렇게 1남3녀 4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내가 막내아들이 된 셈이었다. 딸만 내리 셋을 낳고 나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얻었으니 귀한 자식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에 이어 2대독자였으므로, 나 혼자 부모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 일본 오사카에서 거주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징용으로 일본에 가서 오사카에 일시 정착하는 동안 인쇄소를 경영하며 가계를 꾸려나갔다. 당시는 인쇄소라고 해봤자 큰 거리에 번듯하게 간판을 내 걸고 영업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극히 규모가 작은 영세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나는 온 가족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으며 자라났다. 나는 일본식 애칭으로 ‘노부짱’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으나, 일본 아이들로부터 ‘조센징’이란 놀림을 많이 받았다.

그 무렵 나는 일본 아이들과 ‘라무네’라고 하는 구슬치기를 즐겼다. ‘조센징’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도 나는 놀이에 몰두하였는데, 아마 놀림 받는 걸 잊기 위해 더욱 구슬치기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간혹 ‘조센징’ 이외에 ‘닝니쿠 쿠사이’라는 놀림도 받았는데, 그런 소리가 듣기 싫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일본 아이들과 노는 것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웃사이더가 되길 싫어했다. ‘조센징’이라고 따돌림을 받을수록 더욱 일본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려면 그들이 놀리건 말건 놀이에 더 열중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열심히 구슬치기를 하여 일본 아이들로부터 많은 구슬을 따는 것으로 그들이 나를 놀리는 데 대한 보복을 하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큰 나무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 이외에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이 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아버지가 나를 영화관에 데리고 가서 <마레이노 하리마오>란 일본 영화를 보여주신 일이다. ‘마레이노’는 일본말로 말레이시아를 뜻하고, ‘하리마오’는 말레이시아 독립운동가의 별칭으로 ‘호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첫돌 무렵 일본 오사카에서 고종사촌 형과 함께 / 왼쪽이 필자

아무튼 그 영화는 말레이시아 독립운동가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지금 구체적인 내용까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영화를 본 것이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최초로 문화와 접하게 된 기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지금까지 영화제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어린 내가 받았던 문화적 충격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됐든 나는 젊은 시절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문화계에서 잔뼈가 굵어왔고, 지금까지 문화를 떠나서는 살수 없는 나무가 되어 있다. 그렇다. 나는 문화를 먹고사는 나무가 된 것이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나는 장자(莊子)의 <가죽나무 우화>를 좋아한다. 가죽나무는 몸통이 뒤틀리고 잔가지가 많은 못생긴 나무다. 그 주변의 몸통이 쭉쭉 뻗어 올라간 나무들에 비하면 아주 볼품없는 나무에 속하는 것이다. 원래 쓸모 있는 나무는 목수의 눈에 쉽게 띄는 법이다. 그래서 쓸 만한 재목감이 되면 일찍 베어져 집 지을 때 쓰는 기둥이 되거나 농을 짜는 가구의 재료가 된다.

그러나 몸통이 뒤틀리고 잔가지가 많은 나무는 별로 쓸모가 없어 보여 목수의 눈에 쉽게 띄지 않기 때문에 오래도록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런 나무가 몇 백 년이 지나면 큰 정자나무가 되어 그 아래 큰 그늘을 드리운다. 몸통이 굵은데다가 잔가지가 많아 무성한 숲을 이루니, 그 그늘과 숲은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훌륭한 쉼터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말이 있듯이, 못생긴 가죽나무야말로 나중에 큰 쓰임이 있는 나무로 자라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큰 나무가 되라고 말씀하신 뜻이, 바로 장자의 가죽나무와 같은 그런 나무가 되라는 것임을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러나 나는 큰 나무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내가 천성적으로 비틀리고 잔가지가 많은 못생긴 나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장자의 가죽나무처럼 된다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 실현가능한 일이라고는 감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작은 나무에 불과할지언정, 그에 걸 맞는 그늘을 만들어서 문화계 사람들에게 안락한 쉼터라도 제공하고 싶은 것이 지금 나의 바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