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는 파키스탄의 ‘라호르’에서 아시아 광고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역시 김 부사장과 함께 참석했다.
파키스탄 북쪽 히말라야 산맥 가까이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 라호르에서 열린 대회였지만, 돈이 땀과 먼지에 찌들어서 맨손으로 만질 수가 없을 정도로 더러웠고, 모든 음식이 카레를 바르거나, 묻히거나, 비벼서 먹는 것이었는데, 우리나라 카레와 달리 냄새가 역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파티에 가서는 빵으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했는데, 빵 속에도 예의 그 역한 카레가 섞여 있어서 못 먹고 굶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라호르에서는 중국집을 하나 정해놓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그 집 신세만 졌었다.
1990년에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32차 세계 광고대회가 열렸다. 나는 그곳에도 김 부사장과 함께 참석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1996년의 세계 광고대회 개최지로 우리나라가 선정되었다. 김명하 부사장과 김석년 씨, 이기홍 씨, 신인섭 씨 등이 활발한 로비를 벌여 따낸 수확(收穫)이었다.
나는 독일에 간 김에 그때는 왕래가 어려웠던 베를린에 가보기로 하고 유일한 노선(路線)인 ‘팬 아메리카’ 항공기에 탑승, 오랜 금기의 지역으로 들어갔다. 독일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이어서 약간 겁이 나긴 했지만, 다른 관광객들 틈에 끼어서 동베를린 지역도 넘어가보기로 했다.
‘체크 포인트’를 지나면서 보니까 동서양 헌병(憲兵)들이 어울려서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어딘가 자유의 바람이 불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동베를린에 들어서자 바로 왼쪽에 북한 대사관이 보였는데, 인공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바로 앞에 브란덴브르크 문이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유명한 베를린 광장(廣場)이 보였다.
함부르크 대회에서는 ‘1996년도 서울광고대회 개최’라는 선물과 동베를린을 관광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선물을 안고 돌아올 수 있었다.
중국(中國)과의 광고사업
나는 1989년과 1990년 두 번에 걸쳐 중국을 다녀왔다. 지금은 우리나라와 수교가 되어 왕래가 자유롭지만 당시에는 개방(開放)이 되기 전이어서 아직도 ‘죽(竹)의 장막’이라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당연히 베이징[北京]에는 홍콩의 신화사(新華社)에서 입국도장을 맡아야 들어갈 수가 있었다.
우리는 어렵게 입국을 했지만 중국 방문의 목적이었던,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가까운 방송국 옥상(屋上)에 네온사인을 설치하는 광고건은 중국측 관계자들의 협조로 명쾌하게 마칠 수가 있었다. 이 일의 성공은 ‘릴리 루’라는 미국계 중국여인의 협조에 힘입은바가 컸다.
김명하 부사장과 내가 묵은 건국호텔 근방에는 북한 대사관이 있어서, 밖으로 나다니기가 으스스했지만 그래도 중국 내부에서 느껴지는, 개방으로 가는 기운은 완연했다. 우리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만리장성, 이화원, 자금성 등 북경 근방의 관광지를 돌아다닐 수 있었고, 중국 고유의 화려한 음식은 맛보았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중국에 어렵게 갔으면서도 상하이(上海), 소주(蘇州), 진시황릉(秦始皇陵) 등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 이를 데 없다.
세계역도대회(世界力道大會)
1991년 2월, 모스크바 근방의 ‘오리울’이라는 곳에서 ‘드루즈바컵’ 세계역도대회(世界力道大會)가 열렸다.
나는 단장으로 임명되어 조석희 감독 등 선수단을 이끌고 KAL편으로 모스크바로 향했다. KAL은 북한 영공을 피해, 일본 니이가타[新潟] 근방으로 해서 소련 블라디보스톡, 하바로스크를 지나 한밤 중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릴 수가 없었고, 다시 이륙하여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에어프랑스로 갈아타고 또 한 번 모스크바로 향해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소련과 영공통과협정(領空通過協定)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모스크바에 도착한 우리는 입국 수속을 밟았고, 대학 기숙사에 선수단이 짐을 풀 수 있었는데, 공항 통과 때나 기숙사에 들어올 때도 미국 담배 ‘말보로’ 한 보루씩이 필요할 만큼 그 당시의 소련공항의 질서는 엉망이었다.
하루 휴식을 취한 우리 선수단은, 크기만 하고 지저분하기 한량없는 모스크바 역에서 기차에 올라 시합 장소인 오리울에 도착했는데, 눈이 어찌나 많이 왔던지, 온 세상이 하얗게 파묻혀 있었고, 길은 겨우 승용차가 다닐 만큼만 치워져 있었다.
그런데 정해진 숙소에서 이틀 후의 경기에 대비, 선수들의 몸 상태를 점검하던 조석희 감독이 비명을 내질렀다. 우리 선수단에서 메달을 딸 가능성이 잇는 선수는 가장 가벼운 52kg급에 출전하는 고광구 선수 한 명뿐으로 그야말로 보배와 같은 존재였는데, 그 고광구 선수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전남 진도가 고향인 고광구 선수는 어렵게 자라 국가대표가 되었는데, 정신도 올바르고 근성도 있었지만 식탐(食貪)이 많은 것이 흠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조석희 감독이 비행기에 타기 전부터 음식을 많이 먹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도, 고 선수는 비행기 음식이 맛있다고 야금야금 먹어댄 데다가, 비행기 속이어서 꼼짝 못하고 앉아 잇는 바람에 살이 마구 찐 모양이었다.
체중을 달아보았더니 무려 6kg이 오버인 58kg이었다. 고 선수는 다음날 하루 종일 몸무게를 줄여야 시합에 나갈 수 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다른 선수들은 제쳐두고 조 감독과 나는 고 선수에게만 매달렸다. 고 선수와 함께 사우나에서 땀을 빼기로 한 것이다. 추운 지방이어서 사우나 시설은 아주 잘되어 있었다.
고 선수는 땀 옷을 잔뜩 끼어 입고 사우나 도크로 들어가고, 그의 고통(苦痛)을 덜어줄 생각으로 나와 조 감독과 함께 들어갔다. 물론 우리 두 사람은 옷을 걸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숨이 막혀왔다. 정말 무서운 싸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