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독창을 하다 (63회)

나와 조 감독은 교대로 들락거리며 고 선수 모르게 빵과 음료를 조금씩 먹었지만, 고 선수는 간간히 입술을 축이기만 하면서 견디어 냈다. 나중에는 잠깐씩 나갔다 들어오기도 했지만 고 선수는 그렇게 혈투(血鬪)를 벌인 끝에 마침내 54kg까지 몸무게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었다. 조 감독의 말로는 다음날 아침까지 어떻게든 2kg을 더 빼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은 8시에 몸무게를 재고 10시부터 시합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새벽부터 고 선수를 데리고 사우나에서 싸우고 온 조 감독은 이제는 하늘에 맡기자면서 계체량 장소로 고 선수를 데리고 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선수들이 저울에 올라서서는 발뒤꿈치까지 들고 무게를 다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내 고 선수 차례가 되었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저울을 지켜보았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52kg에서 20g이 모자라는 몸무게로 계체량을 통과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많이 감량을 한 꼴이 되었다.

감독과 다른 선수들이 고 선수를 토끼 몰듯이, 옆방으로 데리고 가서 특별히 만든 미음 같은 죽을 먹이고 안마를 해주는 등 법석을 떠는 모습들이 차라리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 우승을 한 고광구 선수, 조석희 감독과 함께

애국가 독창을 하다

세계대회가 열리는 공회당(公會堂)같은 시합장소는 생각보다 멋있게 꾸며져 있어서 어려운 형편의 소련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어다.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나라다웠다. 관중들도 만원을 이루어 경기장은 열기가 넘쳐 있었고, 특히 모스크바는 물론 타슈겐트, 알마타 등 먼 곳에서 온 우리 동표들도 상당수였다.

이번 드루즈바 겸 세계 역도대회는 북한에서도 물론 참가를 했고, 중국과 몽골, 동구라파 강호들도 모두 참가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국제대회였다.

이번 대회에는 고광구 선수가 속한 52kg급이 특히 열전이었다. 중국, 북한, 소련 선수, 그리고 고 선수 등 네 명이 남았다가 북한과 소련 선수가 3, 4위로 쳐지고 마지막에 중국 선수와 우리 고 선수가 남았다. 중국 선수가 먼저 바벨을 들었는데 실패하고, 마침내 고 선수에게 찬스가 왔다.

그 많은 살을 하루 사이에 뺀 고 선수가 과연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선수단이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고 선수가 힘차게 바벨을 잡았다. 그리고 일단계로 가슴 까지 들어올린 다음 힘차게 발을 차면서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마침내 세계를 들어 올린 것이다. 고광구 선수가 52kg급에서 세계 선수권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 시상식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나

박수가 터져 나오고 소련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모두 일어나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시상식에서 또 문제가 생겼다. 주최 측에서 태극기를 준비는 했으면서도 우리나라 애국가는 ‘사용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아예 마련하지 않은 것이다.

어디에서 급히 테이프를 구해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국가(國歌)가 없는 시상식은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육성(肉聲)으로 애국가를 부르겠다고 자청했고,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주최측에서는 구세주를 만난 듯 나를 얼싸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왜 그렇게 마음이 설레는지, 무대 뒤쪽에 가서 애국가를 연습하는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만 나오고 그 뒤는 이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평소에 로타리클럽 모임에서도 애국가는 항상 합창을 했었고, 아나운서로 사람들 앞에 수없이 섰던 나인데 왜 그렇게 떨림이 멈추지를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엄숙하고 장엄하게 시상식(施賞式)은 시작되었다. 중국의 오성기와 북한 인공기를 거느린 태극기가 게양되는 가운데, 무대 중앙에 선 나는 마이크를 잡고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애국가가 아주 잘되는 것이었다. 나는 부르면서 스스로도 도취(陶醉)될 정도로 멋있게 불렀다. 애국가가 끝나자 장내가 떠나갈 듯이 박수가 터져 나오고 우리 동료들은 다시 한 번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개방(開放)되지 않은 소련 땅에서, 그것도 북한 선수단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육성으로 애국가를 무사히 부른 나는 여간 흐뭇하지가 않았다. 그것도 용상과 합계에서 우승하여 두 번이나 애국가를 불렀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 뒤에 북한선수단 단장과 만났을 때도 이 일이 화제로 올랐는데, 자기라면 못했을 거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나는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정이 든 북한선수단을, 모스크바에 다시 왔을 때 북한식당 <평양>으로 초청하여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또 우리선수단 단복(團服)가운데 추리닝을 처지가 어려운 몽골선수단에게 모두 주었다.

우리 선수단이 귀국 했을 때 고광구 선수 세계대회 우승과 함께 시상식 때의 나의 애국가 독창이 화제에 올랐는데, 당시 중앙일보에 이 사실이 자세히 보도되었고, 새로운 사실도 하나 덧붙여 기사화되었다.

몇 년 전 미국에서 열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권 대회에서 장창선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때도 주최 측이 태극기는 준비 했는데, 애국가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한다. 관중석에 있던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이 사실을 알고 무대로 뛰어올라가 육성으로 애국가를 부른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