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과 서문
  [프롤로그]

- 약력 - 

경성부 소격동에서 출생했다.
진주 제일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여 진주중학교로 소개 전학을 갔다.
경성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진학을 했다.

졸업과 동시에 해군에 입대, 중위를 예편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보스턴 터프츠대학교 인턴, 레지던트, 치프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전임 강사로 재직했다.

미 외과전문의 한국인 1호로서 귀국한 뒤, 백병원에서 잠시 근무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쳐 정교수직을 역임했다.
그 사이 신영병원을 개원했다.

미국 외과학회 정회원으로 대한소화기병학회 회장,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지냈다.
고대 구로병원 초대 원장, 서울 중앙병원(현 서울 아산병원) 원장을 지냈다.
상훈으로는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기업문화상, 한국능률협회 최고경영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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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연재에 대한 변

평생을 바쁘게 살아왔다. 그 사이 사이 잘 놀기도 했다. 남들은 이런 나를 보고 의사로서 누릴 건 다 누렸을 텐데, 부러워할게 또 뭐가 있느냐고들 한다. 하지만 얼추 인생을 많이 살았다고 생각해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54세에 수술칼을 놓은 것, 72세까지 현역으로 있었던 것, 연구다운 연구를 직접 해보지 못한 것이 제일 마음에 걸린다.

돌이켜보건대, 72세에 은퇴한 것을 후회한다. 65세에 정년퇴임을 했더라면 나 자신에게 여러 가지로 좋은 여생을 선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두고두고 한다.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늙는 속도는 ‘꾸준히, 천천히’가 아니라 갑자기 섬광처럼 수직 하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한 결정도 있다. 미국에 유학 가서 인턴을 세 번씩이나 한 것, 미 외과 전문의 자격을 얻고도 미국에 영주하지 않고 한국에 돌아와 살았던 것,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직을 적정한 시점에서 사임한 것, 필연적인 동기를 가지고 신영병원을 시작했던 것과 충분한 상승세의 시점에서 그만둔 것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어느새 체력도 많이 떨어진 나의 가장 큰 핸디캡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청기를 수없이 바꿔봤지만 소용이 없다. 시끄러운 식당에서 대화할 때나 전화로 통화를 나눌 때는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이로 인해 고독해지고, 우울해지고, 그나마 남아있던 친구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몹시 아쉽다.

특히 전립선암 치료를 했던 최근 2년 사이에 육체적으로 칠팔 년은 더 늙어버렸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청춘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나는 오늘도 열심히 운동하면서 유쾌하게 살고 있다.

주변에 있는 지인들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 꼬박 1년에 걸쳐 내 살아온 길을 더듬어 이글을 내놓게 되었다. 잠깐 되돌아봐도 의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참 다양하고 흥미로운 인생을 살아왔다. 읽다보면 재미도 있겠고 젊은이들에겐 인생의 간접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이름 석 자의 주인공들은 따로 말하지 않더라도 내 은인이거나 혹은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들이다. 그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14년 전에 쓴 이 회고록이 2020년 히스토리스의 지면에 연재되게 되어 보다 많은 분들과 나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다시 한 번 지난날을 돌아보며 독자들과의 공감대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민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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