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T 세례식 (9화)

나는 부산의 대신동 처가에서 장인어른과 함께 지냈다. 틈나는 대로 전세를 알기 위해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는데,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수원으로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취직할 곳을 알아보러 돌아다니며 부산역 앞 미군 민사처에서 미 8군의 통역관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듣고 응모했다. 훗날 LG그룹의 고문이자 1년 선배인 구평회 씨와 박승찬 씨가 그곳에서 일하면서 날 도와주었다.

서면 외곽의 경마장에서 미 적십자사가 운영하는 천막 카페 겸 군 위안소인 레드크로스의 통역자리였다. 전방으로 갈 장병들과 그곳에서 온 장병들이 커피와 도넛을 먹으면서 영화와 뉴스를 보는 휴식처였다.

당시 내 영어실력은 단문과 문법만 겨우 알뿐 쉬운 영어책도 더듬더듬 읽는 수준이었다. 영어 회화를 해볼 기회는 그때까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거의 백지상태였다. 누가 영어로 말하면 잘 알아듣지 못해 종이와 펜을 준비해 다니면서 써달라고 했다.

“물 가져와.”
“아, 워터?”
내가 겨우 알아듣고 영어로 다시 확인하자 미군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워러.”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물, 워터.”
“노, 워러.”

나는 당최 ‘워러’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일단 물병을 가져다 주었다. 그랬더니 더 이상 주문사항이 없다. 그제야 ‘워터’와 ‘워러’가 똑같이 물을 뜻한다는 것을 눈치로 알아차렸다.

그 후로도 원어민의 발음을 몰라 곤욕을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미군들이 날 질책하는 말조차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땅에 침을 뱉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나는 견뎌야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엄청난 수의 피난민들 때문에 부산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당연히 위생상태도 엉망이었다. 만원 전차나 버스를 타고 다니다보면 옆에 있는 사람의 옷에 이가 기어 다니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내가 다니던 서면의 적십자 위안소에서는 한국인 종사자들을 다 불러모아놓고 DDT를 뿌리는 일이 정기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너무나 굴욕적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소중한 직장이라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다녔지만 결국 두 달쯤 지나면서 그만두었다.

▲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DDT가 뿌려지는 모습 [출처 ; pinterest 핀터레스트]

다시 구평회 씨와 박승찬 씨를 찾아가 취직을 부탁했다.

“의사 행세를 할 수 있겠어?”
“해보겠습니다.”
“UN 민사처 부산지부에서 의사 통역이 필요하니 그곳에 가보는 게 좋겠어.”

당시 UN민사처 부산지부는 옛 부산 시장실을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치프 중령 켈리(Keele)밑에 멕시코인과 영국인, UN 측 직원 예닐곱 명에 한국인 조수가 한명 씩 있었다. 나는 보건부 담당 휘하에 의사로 고용되는 것이었다. 피난민 수용소의 보건관리 차원에서 전염병을 관리하고 약품을 나누어주는 일이 주된 임무였다. 나는 면접시험을 보았다.

“의사냐?”
“네.”
“언제 졸업했냐?”

순간 마음이 약해진 나는 이실직고했다.
“지금 졸업반입니다.”

결국 나는 보건을 담당하고 있는 멕시코인 로비로사(Robirosa)의 UN주재관에 배속되었다. 운이 좋았다. 내 상관이 멕시코인이어서 부족한 영어를 눈감아주는 것 같았다. 피차 영어가 막히니까.

주로 지프를 타고 피난민을 위한 시내 의료시설을 순방하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지프를 직접 몰고 싶은 충동을 감출 수 없어 틈만 나면 지프를 타고 운전 연습을 했다. 한번은 운전 연습을 하다가 시청 옆에 붙어 있는 육군병원 담장을 들이박고 말았다.

이 사건은 곧 병원장인 김동익 중령에게 보고되었지만, 김 중령은 의과대학생인 나의 실수를 흔쾌히 용서해주었다. 배우는 학생의 호기심을 이해해준 병원장의 배려 덕분에 그 일은 이내 무마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보건 담당의사의 조역으로 일했다. 어느새 나와 많이 친해진 로비로사는 몰래 부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물건을 사와서 파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온 물건을 한국 시장에 팔아주는 일을 내게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를 도와주면서 얼마간의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호주머니가 두둑해지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1951년, 부산은 때 아닌 춤바람에 휩싸였다. 나는 부산 시내에서 유명한 춤선생 권오직 씨를 찾아가 춤을 배웠다. 만주 하얼빈에서 온 그는 왈츠, 탱고, 블루스를 추는데 기본 동작을 중시하는 진짜 춤 선생이었다.

나는 열심히 춤을 배웠다. 그리고 UN군만 출입할 수 있는 광복동의 나이트클럽(UN구락부)에 권오직 씨를 따라 들어가 춤을 추었다. 머지않아 나는 댄서들의 파트너가 되어 독무대에서 춤을 출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