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 그 참을 수 없는 문제 (10...

그 와중에 전시연합대학이 부산에 발족되었다.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의 의과대학생들을 한군데 모아 합동수업을 했다. 서울의 4개 대학, 즉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수도의과대학(고려대 전신) 학생이 함께 수업을 받았는데, 한 학년 당 학생 수는 30명이 전부였다.

그 수업을 받기 위해 거리에 나오다가 까딱 잘못하면 곧바로 징집되어 전장으로 끌려가기 일쑤였다. 일단 학교는 졸업해놓고 입대하기 위해서 요령껏 밖에 나다녀야 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나는 UN의 기관에 취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는 어쩌다가 한 번씩 들렀다. 다른 학생들도 대개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 틈에 주먹을 잘 쓰는 한 친구가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김완식은 부산에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학교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술값이 없어.”

그 친구가 투덜거리면 우리는 너나없이 호주머니를 털어 얼마간이나마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친구 덕분에 실제 출석인원이 다섯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출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 친구가 대리 출석을 해준 것이다.

시험 때가 되면 김 군이 대신 답안지를 써주었는데 그 덕분에 역시 전원이 시험을 본 것으로 되었다. 교수도 전란의 와중에서 학생들이 겪는 고충을 이해했으므로 모른 척 눈감아주었다.

여전히 거리에서는 국군 신병 징집이 있었고, 신분에 관계없이 일단 잡혀가면 얼마간의 기초훈련만 받은 채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곤 했다.

나도 여러 번 아슬아슬한 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잡혀서 타고 가던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망친 일도 있었다. 이러다가 언젠가 당하고 말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찌어찌하다보니 1952년 2월, 졸업이 다가왔다. 이때 나는 자신을 돌이켜보며 뭔가 획기적인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밤 춤을 추러 다니는 것은 결코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경기중학교에서 진주중학교로 전학을 갈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무엇인가 중대한 환경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上 전시연합대학 서울의대 校舍 (부산 광복동 1952.) / 下 전시 부산의 서울의대 부속병원(광복동. 1952.) [출처 ; 서울대 의대]

나는 졸업과 함께 주저 없이 해군 군의관에 자원입대를 했다. 1952년 3월, 서울대, 연세대 졸업생 열세명과 함께였다. 내가 해군에 입대할 때까지도 아내는 진주에 있었다. 아내는 꼭 한 달 뒤인 4월에 진주에서 장남 태규를 출산했다.

군의학교에 입소한 열세 명의 군 후보생들은 한방에서자고 함께 훈련했다. 훈련 중에 가장 큰 고생은 뭐니뭐니 해도 배고픔이었다. 식사라고 해봐야 잡곡밥과 소금물 한 종지가 전부였다.

끼니때마다 식탁에 앉을라치면 소금물에 밥을 말아 젓가락으로 휘 저어 후루룩 마시면 뚝딱이었으니, 식사시간은 30초면 족했다. 하루 세끼가 이런 식이었다. 혈기왕성한 장정들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칼로리 섭취는 꿈도 못 꾸고, 만날 영양결핍 상태인지라 틈만 나면 졸렸다. 옆에 있는 동료들도 나와 똑같은 증세를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화장실(그 당시는 ‘통시’라는 재래식 화장실이었음)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우리의 그것은 퍽, 하고 퍼지는 소똥처럼 푸석푸석했다. 보통의 자줏빛을 띤 갈색의 똥과는 전연 달랐다. 풀만 먹는 소가 푸석푸석한 똥을 싸는 이유를 그때 알았다. 어쩌다가 일요일에 외출이 허용되어 쌀밥과 수육을 먹고 들어오면, 다음 날 본 용변 상태는 확연히 달라졌다.

군 당국은 석 달의 훈련기간 동안 오전에는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52년 졸업생부터는 의사고시를 치러야만 의사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일 년 선배들만 하더라도 졸업과 동시에 의사자격증이 주어졌지만 우리 때부터 제도가 바뀐 것이다. 새로운 제도 속에서 우리는 모두 열심히 공부하여 그해 5월 말, 열세 명 전원이 제1회 의사고시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내 앞에는 임관(任官)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해상 근무에 적합한지의 여부를 가늠하는 것인데, 나는 뱃멀미를 심하게 했다. 당연히 인사기록부에는 해상근무 부적격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그러한 판정을 안고 해군중위로 임관된 직후, 나를 포함한 모두가 진해 해군병원의 인턴으로 배치되었다. 주로 외과만 있던 진해 해군병원에서 그렇게 교대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때는 1952년 6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