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사람들은 모두 매우 분주해보였다. 나는 접수창구에 가서 말했다.
“내 이름은 민병철. 한국에서 인턴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 그래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다행이었다. 이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 순간 배가 고파왔다. 무엇보다도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본능적인 욕구는 갈망할 틈도 없이 산산이 부서졌다. 내 인사를 받은 의사 한 명이 눈을 부라리며 질책했기 때문이다.
“당신, 왜 이제 온 거야?”
“수속이 늦어져서요.”
“이번 달에는 산부인과를 돌아야 한다. 빨리 가운 입고 들어가. 당신 때문에 다른 인턴들이 쉴 틈 없이 일한다구.”
미국은 인턴 복무기간이 7월 1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음 해 6월 말에 끝나는데, 나는 7월말에야 그 대열에 합류했으니 무려 한 달이나 늦은 것이었다.
“짐은 어떻게 하고......?”
나는 어떻게든 잠부터 자고 싶었다.
“접수창구에 맡겨놓고 들어가요. 곧 산모가 해산할 테니 가서 도와줘요.”
“산부인과?”
한 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는 산부인과라니.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해군병원에서의 경험은 외과가 전부였다. 어쨌든 짐을 접수창구에 맡긴 채 가운을 입고 병원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닥터 민, 환영합니다. 산모가 많아 일손이 부족했는데, 잘됐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악수를 나누기가 무섭게 나는 얼른 사정부터 했다.
“나는 지금 피곤하고 짐도 접수창구에 맡겨 놓은 데다 무엇보다 몹시 배가 고픕니다. 오늘 하루만 쉬고 내일부터 일하면 안 될까요?”
“안돼요. 근무는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수간호사에게 사정해보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어디에선가 가져다 준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고 있을 때, 산모가 출산한다는 다급한 소리에 나도 덩달아 내달렸다.
수술대 위에는 해산 직전의 산모가 누워있었고, 이미 아기의 머리가 나오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야 애가 나와요. 닥터 민, 손 소독하고 와요.”
나는 다시 간호사에게 사정을 했다.
“나는 정말 애 낳는 건 처음 본다니까요. 아무것도 무르니까, 그러니까 날 좀 도와줘요.”
고참인 듯한 간호사가 말했다.
“정산부이니까 괜찮아요.”
“아니, 정말 애 낳는 일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단 말입니다. 처음이라구요. 제발 날 좀 살려주세요.”
내가 통사정을 하자 간호사들이 내 입을 막았다.
“쉿! 환자가 듣고 있잖아요.”
나는 하는 수 없이 손을 소독하고 가운을 입었다. 순간 산모의 비명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간호사가 다급한 눈짓으로 날 불렀다. 나는 얼른 간호사 곁으로 다가가 출산을 도왔다.
산모가 고통의 소리를 토해낼 때는 안쓰러웠는데 막상 아이를 받을 때는 사실 흥미로웠다. 머리가 먼저 나오고, 탯줄을 자르고, 태반도 꺼내고, 그다음에는 세상이 다 조용해졌다.
“아, 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한 명의 산모가 들어왔다. 산모들은 한결 같이 목소리가 컸다. 그래도 이번에는 차분하게 출산준비를 도울 수 있었다. 다리부터 나오는 아기를 간호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받기도 했다.
병원에 처음 도착한 날, 공교롭게도 다섯 명의 아이를 받느라 나는 꼬박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산부인과에 근무하는 인턴, 레지던트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환영식은커녕 늦게 왔다고 욕만 얻어먹었다.
미국에서의 인턴 생활은 그렇게 첫날부터 호된 고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기숙사는 병원에 도착한 24시간 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병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기숙사는 조그만 3층짜리 개인주택을 개조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1층에는 거실과 공동 샤워장이, 2층과 3층에는 침실이 있었다.
3층의 자그마한 방을 지정받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정신없이 곯아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