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오랜만에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한 뒤에야 나는 희망찬 발걸음으로 정상 출근을 했다.
병원에서는 자체적으로 ‘집담회’를 열었다. 매주 두세 가지의 주제를 갖고 토론하는 시간을 병원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열다섯 명가량의 레지던트들과 인턴들이 모였는데, 여기서 나는 정식으로 신고식을 하고 그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사회자인 담당 스태프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당신 처음 보는 얼굴이군?”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은 지금 전쟁 중이지?”
“휴전했습니다.”
당시 미군 45만 명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원서를 넣고 왔습니다.”
“음, 잘됐군.”
그는 별안간 엑스레이 사진을 걸더니 나에게 질문했다.
“이게 무슨 병인지 말해봐라.”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모른다고?”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정신이냐? 이렇게 큰 위궤양을 모르겠다고?”
오히려 나는 반문했다.
“이게 위궤양입니까?”
“피곤해서 정신이 없나보군. 이해해주지.”
나는 그렇게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막상 인천 생활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나 자신이 미국 출신의 인턴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실력, 영어, 그리고 체력이었다.
‘어떻게 따라가지?’
어쩌겠는가? 나는 일이 끝나면 무조건 병원 도서관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하도 열심히 공부에 매달리다보니 폐관 시간인 10시가 되면, 사서가 도서관의 규칙마저 어겨가며 내가 <NEJM,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뉴잉글랜드 저널 메디슨지. 세계적인 권위의 의학저널>을 가지고 나가도록 허락해주었다.
나는 의학사전을 펼쳐놓고 <NEJM>에 실린 CPC(임상-병리 집담회) 자료를 단어 하나하나 일일이 찾아가며 공부했다. 이를 통해 내가 잘 모르는 혈액 검사라든가 엑스레이 촬영법 등을 의학용어와 함께 알아가면서 실제 임상에서 환자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조금씩 터득해나갔다.
나는 교과서 위주의 공부보다 실제 임상경험 판례집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살아 있는 공부를 했다. <NEJM>에 나오는 CPC 자료를 매주 한두 권씩 6개월 정도 공부하자, 내가 보기에도 눈에 띄게 실력이 향상되었다.
인턴으로 일했던 머시병원은 병상이 250개나 되었는데도, 의사에 대한 교육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인턴 여섯 명, 레지던트 열 명으로 구성된 삼류병원으로 미국인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필리핀인 세 명을 포함하여 그리스인, 인도인, 이탈리아인,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당시 머시병원의 인턴 월급은 150달러였다.
처음 3개월 동안은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서 거의 고기만 먹었더니 변비가 생겨 고생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볼라치면 아주 죽을 맛이었다. 나중에는 매운 맛이 나는 타바스코를 가져다가 모든 음식에 뿌려먹었다. 그런 나의 모습에 미국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질겁했다.
“그렇게 매운데 위가 견뎌내겠냐?”
“김치도 먹는데 뭘.”
나는 그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맵게 식사를 했는데 얼마 안가 속이 좀 나아졌다. 속이 니글거리는 문제는 그렇게 해결했다. 약 3개월이 지나면서 미국의 음식문화에도 적응했고, 더불어 격주로 쉬는 주말에는 덴버 시내를 산책하면서 미국을 조금씩 알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한국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못내 서운했다. 말이 통하는 한국인을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덜 외로울텐데.......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향수병에 젖을 무렵, 나는 덴버 시내에 한국에서 유학온 유학생이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나는 곧바로 수소문 했고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인문사회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이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나보다 한참 어렸다. 나와 마주한 그 학생도 이역만리에서 어렵사리 동포를 만났다는 생각 때문인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피차 외롭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손 위인 내가 그를 많이 위로해주었다.
휴일에는 주로 중국식당에 가서 식사를 해결했다. 밥 세 공기를 간장에 말아먹으면서 김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수저를 뜰 때마다 간절했다. 그러나 그러한 간절함도 이내 포만감으로 사라져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