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이탈리아에서 온 동료 인턴 지자(Zizza)가 중고 승용차를 구입했다. 인턴 봉급 150달러를 아껴서 구입한 것이라 나름대로 의미가 깊었다. 나는 차를 마련한 그에게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물론 그가 차를 사용하지 않는 휴일에는 더러 빌려 타기도 했다.
“1달러로 가스 오 갤런을 넣어줄 테니 차 좀 빌려줘.”
“오케이, 틀림없이 넣어라.”
처음에는 면허증도 없이 다짜고짜 시내 드라이브에 나섰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정식으로 운전연습을 한 뒤 덴버에서 운전면허증을 땄다. 그때부터는 빌린 차를 자유로이 마음껏 끌고 다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늘 그렇듯 내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인 12월이 돌아왔다. 필리핀 인턴들은 월급을 많이 주는 곳만 찾았고, 자기네들끼리 몰려다니면서 1층에서 밥을 지어 손으로 집어먹곤 했다. 3층인 내방에 들어가려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곁을 지나쳐야 했는데, 그들은 예의로라도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사뭇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국인들은 실력으로 보자면 더 이상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 같은 외국인들은 이상하게 늘 그들에게 소외되었으므로, 나는 항상 나 자신과 싸우는 고독한 생활을 반복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오직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우루루 몰려다니거나 삼삼오오 먹을 것을 탐하기만 하는 무리들과 일절 어울리지 않았고, 늘 도서실 혹은 내 방 책상 앞에서 살았다. 숙소에서 아무리 떠들썩한 파티가 열려도 나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공부에만 매달렸고, 어쩌다 외출하기 위해 1층을 지나치더라도 그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정말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그 사이, 나는 평생토록 잊지 못할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일반 외과 레지던트 1년차였던 유대계 미국인 노먼 로니스(Noman Ronis)다. 스위스에서 의대를 나온 로니스는 스위스 국적의 여자와 결혼한 친구였는데, 말이 통하게 되면서 제일 친해졌다.
로니스는 자신이 2년차로 올라가게 되면 자기 밑에 1년차로 올 것을 권유했다. 레지던트는 당시 250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니 머시병원에서 좋은 의사가 되기에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을 들은 로니스는 맞장구를 치며, 좋은 대학병원에 직접 편지를 보내라고 귀띔해주었다.
밤을 새워가며 엄선해 편지를 보낸 미국 전역의 병원이 아마 50군데는 넘었을 것이다. 다행히 약 열군데 병원에서 답장이 왔고, 그 중 두세 군데에서 인터뷰를 하러 오라는 적극적인 답변이 왔다.
사실 된다는 보장도 확실치 않은데 그 먼 곳까지 갈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돈도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욕심 같아서는 하버드의 의과대학 병원에 가고 싶었다. 당시 보스톤에는 세 개의 의과대학이 있었는데 하버드대학과 보스턴대학, 그리고 터프츠대학이 전부였다. 로니스도 생각을 바꿔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대학 신경외과를 지망한다고 고백했다.
“나는 하버드대학 의대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
“멕그레거에게 가서 상의해봐.”
“그래도 될까?”
“당연하지.”
나는 교육수련부장인 멕그레거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하버드대학 의대 출신이자, 외과의 전문의이기도 한 그는 덴버시에서 개업의로 일하는 동시에 머시병원의 의료교육위원장이라는 보직을 맡고 있었다.
나는 멕그레거에게 말했다.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무슨과를 지망하는데?”
“외과계통으로 가고 싶습니다. 일반외과 레지던트 일 년차로요.”
미국 전공의 제도상, 외과 특과를 하려면 일반외과를 일 년 더 순환근무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해 닥터 민 경력으로 하버드대학 레지던트는 과한 욕심이네. 거긴 미국인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사람이 아니면 어려운 곳이야. 차라리 이곳에 남아 있게나. 그러면 레지던트 봉급으로 이백오십 달러는 주겠네.”
“꼭 보스턴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싶습니다.”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대학이 좋겠군. 거기라면 내가 소개해 줄 수 있네.”
“아,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멕그레거는 그곳의 교육수련위원장인 그의 동기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를 소개해주었다.
그로부터 이주일 뒤, 터프츠대학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나는 반가움 반, 두려움 반으로 봉투를 개봉했다. 인터뷰를 하고 결정할 테니 일단 보스턴에 와보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멕그레거에게 보여주었다.
“무리해서라도 다녀오게.”
내가 비행기 값을 걱정하자 그는 선뜻 퇴직수당 한 달치의 월급을 가불해주었다.
그 돈으로 나는 시카고를 경유하여 보스턴으로 도착했다. 1954년, 당시 보스턴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지저분한 고도(古都)같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