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울 준비는 되었나? (18화)

시험을 칠 줄 알고 내심 걱정했었는데, 면접장에서 만난 교수들은 나와 잡담만 나누었다. 한 일반외과 의사는 나에게 취미가 무엇이느냐고 물었다. 내가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라고 했더니, 그와는 30분 내내 음악 이야기만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마쳤다.

물론 다른 외과의사들과도 그대로 인터뷰를 계속했다. 하루 종일 인터뷰를 하는데도 외과 교수들은 외과에 관한 질문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로서는 의아했는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네가 배우러 오는 것이지 가르치러 오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과연 배울 마음이 있는지, 한 인간으로서 교양을 갖췄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인터뷰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인터뷰는 훗날 내게도 후진들을 양성하는데 소중한 기준이 되었다.

덴버에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결과를 통보받았다.

“인상은 좋다. 하지만 인턴을 한번 더해라. 지금까지의 경력을 갖고 바로 레지던트를 하기엔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아니, 세상에 인턴을 삼 년씩이나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처음에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해군, 덴버도 모자라 보스톤까지 가서 그 지긋지긋한 인턴 생활을 또 하라니...... 나는 분통이 터지는 마음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서 내 생각을 전했다. 그러자 저쪽에서 깜짝 놀란 듯 대꾸를 했다.

“아니다. 내실 있는 레지던트가 되게 하기 위한 배려다.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을 다 도는 로테이팅 인턴십(rotating internship)이 아니라 외과 전공 인턴십(straight surgical internship)이다. 잘 생각해봐라.”

인턴이 여러 과를 도는 덴버와는 달리, 보스톤에서는 외과계통에서만 붙박이로 일하는 인턴생활이었다.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 인턴 3년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마음에 생채기를 입히는 것이었다.

“생각해보고 대답하면 안 되겠습니까?”

“좋다. 마음에 결정이 서거든 어찌 되었든 바로 통보해라. 공석으로 비워둘 테니. 반드시 인간적인 신의를 지켜야 한다.”

“알겠습니다.”

▲ 유학시절, 숙소에서

나는 고민 끝에 일단 터포츠대학으로 갈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맥거레거를 다시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닥터 민 생각에 나도 공감하네. 참으로 옳은 결정을 했어. 삼년간 기초를 단단하게 잘 닦으면, 미국인에게도 밀리지 않는 실력을 갖추게 될 것이네.”

맥그레거와 마찬가지로 로니스도 긍정적으로 격려를 해주었다.

“정말 대단해. 너를 존경한다.”

존경? 그럴 만도 했다. 왜냐하면 머시병원에 남게 되면 250달러를 받는 레지던트가 되지만, 보스톤에 가면 약 42달러를 받는 인턴으로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의사의 길을 우선으로 선택한 나를 모두가 격려해주었다.

나는 터프츠대학에 인턴으로 일하겠다는 통보를 보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되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6월 말경, 나는 로니스의 차를 얻어 타고 보스톤으로 장정에 올랐다. 로니스는 부인과 함께 옆 좌석에, 나와 그의 아이 둘은 뒷좌석에 탔다. 누군가 ‘주유소에 들르거든 한번쯤 휘발유 값을 내라’고 조언해준 것이 생각나 나는 첫 번째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히 채워주었다. 로니스는 깜짝 놀라며 고마워했다.

첫날은 로니스가 운전하고 다음날은 내가 운전했다. 하루는 싸구려모텔에서 자고 하루는 미시건 호수를 건너는 배 안에서 잤다. 보스톤에 도착한 것은 6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터프츠대학 의과대학병원(New England Medical Center, 공식 명칭은 뉴잉글랜드 메디컬센터)에서는 7월 1일부터 정상근무를 했다. 인턴 여덟 명중 여섯 명이 미국인이었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른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다시 인턴 근무를 하는 이란인이었다. 우리는 2개월 씩 외과 특과를 순환근무하게 되었다.

로니스와는 서로 바쁜 탓에 만나도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이거나 운 좋게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마주치면 식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머무는 기숙사는 길 건너편에 있었다.

보스턴과 덴버의 인턴과정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덴버에서는 개업의가 자기 환자를 다 챙겼기 때문에 인턴은 편했다. 그러나 대학병원에서는 인턴이 다했다. 보스턴에서는 인턴에게 가르치려는 기식이 역력한데 비해 덴버에서는 인턴이 사환과 다름없을 때가 많았다.

확실히 보스턴 의사는 보수적이었다. 환자를 대할 때, 항상 와이셔츠를 입고 타이를 매야했다. 머리를 감고 빗는 시간마저도 아까워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다니던 나에게도 이 규칙은 고스란히 적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