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술주정뱅이와 파견경찰 (...

레지던트 1년차일 때에는 3개월씩 네 군데를 순환근무 했다. 한 곳은 응급실이었고, 또 한곳은 개업의들이 있는 일반병원이었다. 터프츠 대학병원에는 응급실이 없었기 때문에, 응급실 근무를 위해 보스턴시티 병원에 3개월 동안 파견을 나갔다. 그곳은 김광심 선배가 있는 병원이었다.

시티병원은 8층 건물 전체가 응급실이었다. 하루에 골절환자만 하더라도 대략 100명이 넘게 왔다. 정말이지 쉴 새 없이 응급환자가 밀려들어왔다. 수술실 열두 개가 24시간 돌아갔고, 응급병원 식당도 24시간 풀가동될 정도였다. 덕분에 골절, 외상, 출혈 등 모든 환자의 경우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 병원 응급실에는 파출소가 상주하고 있었다. 만일 응급실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술주정뱅이가 난동을 피우면 곧바로 경찰이 나타났다. 한번은 술주정뱅이가 의료기기를 훼손하고 행패를 부리며 의사의 말을 듣지 않자, 의사는 할 수 없이 경찰을 불렀다. 그러면 건장한 경찰이 곧 달려왔다. 진찰실에서 술주정하는 것이 확인되면 경찰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잠시 나가있으라며 자리를 피하게 했다.

얼마 후, 퍽퍽, 오뉴월에 개패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환자의 곡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이내 경찰이 나오면서 임무를 완수했음을 알렸다.

“이제 말 잘 들을 겁니다.”

다시 진료실에 들어갔더니 술주정뱅이는 입술이 터져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괜찮다는 시늉만 했다. 완전히 순한 양으로 돌변한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말 안 들으면 패는 것은 똑같군!”

그 다음번으로 나는 보스턴에서 기차로 한 시간 30분이 걸리는 피츠버그의 버뱅크병원에 파견되었다. 네 명의 외과의사와 약 200개의 병상을 갖춘 지방 병원이었다. 파견 의사로는 하버드 의대 3년차 레지던트와 1년차인 내가 주말마다 교대로 근무를 했다.

어려운 수술은 3년차가 맡았고, 나는 쉬운 수술을 맡거나 3년차의 조수로 수술실에 들어가곤 했다. 대학병원에서 근무를 하면 42달러를 받지만, 이 병원에서는 250달러를 받았다. 나는 간혹 행려병 환자의 주치의를 했는데, 기존에 있던 외과의가 뒤에서 지도와 조언을 해주었다.

하루는 굉장히 뚱뚱한 여자 환자가 왔다. 갈비뼈가 아프다고 해서 사진을 찍었더니 아무래도 전이암 같았다. 딴 부위에서 옮겨온 암이라면 분명 처음으로 원인을 제공한 부위가 있을 터인데,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퇴근 후 나는 환자를 달래어 병력에 대해 자세히 묻고 세밀하게 진찰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유방 안쪽에서 몽우리를 찾아냈다. 나는 이 사실을 3년차 레지던트에게 보고했고, 수술을 통해 조직검사를 했더니 내 생각대로 암이었다.

▲ 미국 유학, 레지던트 시절

또 다른 환자는 나에게 윗배에 둔통이 있으며 등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된다고 호소했다. 통상적인 병원의 검사로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일전의 환자처럼 저녁 무렵에 자상하게 병력을 물어보고 진찰한 결과, 췌장암이라는 내 나름의 판단이 섰다.

“조직검사를 해봅시다.”

내가 주장해서 개복해보니 정말 췌장암이었다. 이미 수술할 시기를 놓쳐버리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병원에서 나의 3개월간의 파견 근무 보고서를 엄청나게 잘 써준 듯싶다. 이듬해 나는 2년차 레지던트로 추천받을 수 있었다.

2년차가 되면서부터 제한적이지만 환자를 책임지고 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한편, 밀라 교수가 세미나를 주관하였는데, 그는 예전 한국에서 강의 받은 송진무 선생과 같은 스타일로 발표를 하도록 지시했다.

“췌장의 생리에 대해 보고하도록.”

나는 두 달에 걸쳐 100시간 분량의 발표내용을 준비했다. 그것을 40분 분량으로 압축하여 발표하여 칭찬을 받아낼 정도로 나는 매사에 공을 들였다. 내가 발표를 마치자 밀러 교수가 칭찬해주었다.

“내가 미처 몰랐던 것까지 닥터 민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잘 했어.”

나를 칭찬해준 밀러 교수가 무척 고마웠다.

훗날 나는 미국인 출신과 경합한 끝에 치프 레지던트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는 모두 밀러 교수가 세미나 발표사례를 치하하며 추천한 덕분이었다. 그러자 2년차에서 탈락되어 다른 병원으로 가게 된 조지아주 출신의 미국인 레지던트는 내게 야유를 퍼부었다.

“너희 때문에 내가 쫓겨나야 되겠냐? 엘로우(황인족을 낮추어 이르는 말) 때문에?”

눈앞에서 모욕을 당한 것이다. 참다못한 나는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그를 데리고 비상계단으로 갔다. 나는 그를 구석으로 몰아붙인 뒤 멱살을 잡았다.

“날 모욕했겠다. 한번만 더 날 모욕하면 그땐 널 죽여 버리겠다!”
“농담 마.”
“농담 아니야!”

나는 손이 바스러져라 그의 멱살을 틀어쥐며 단호하게 노려보았다.

“오케이, 오케이!”

그는 “민병철의 눈을 보니까 무섭더라”는 말을 병원에 쫙 퍼뜨렸다. 그 뒤로 병원에서 나를 괄시하는 일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