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내가 일하던 병원에는 유명한 소아외과 의사인 스웬슨 교수에게 배우러 오는 펠로우(레지던트를 거쳐 전문의 수련과정을 밟고 있는 의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기간은 천차만별이었다. 그 당시 펠로우들은 당기 수련을 위해 한두 달 정도 자비로 체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국비로 펠로우 과정을 밟는 외국인 의사들도 있었다. 그들에겐 병원과 환자에 대한 책임도 의무도 없었다. 그저 병원 측의 스웬슨 교수를 위시로 한 스태프들의 수술과정을 어깨너머로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진짜 어려운 수술이나 새로운 수술, 의사의 가족 수술일 경우는 교수가 직접 집도했지만, 그렇지 않은 신환(新患) 수술의 경우 대략 3분의 2는 레지던트의 몫이었다. 그런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는 펠로우들의 질투는 의외로 강했다. 그들은 자신보다 열 살 정도 아래인 레지던트, 인턴을 우습게 여기고 깔보았다. 그 와중에 경쟁을 뚫고 미국인들을 뛰어넘어 3년차 레지던트로 올라갔다.
이제 내가 동료 미국인들에게 뒤쳐진다고 생각했던 체력, 실력, 영어 중에서 체력과 실력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영어는 만회하기 힘들었다. 정확하게 빨리 읽어내는 능력이 나에게는 부족했다.
이를테면 두 번의 부정으로 긍정문이 되는 경우가 어려웠다. 예를 들자면 ‘아닌 게 아니라’와 같은 표현이다. 미국인들은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못해 본능적인 수준인데 반해, 외국인들은 그 차이를 쉽게 체화하지 못했다. 나 역시 Not Unneccesary와 Neccesary의 차이점을 한참동안 생각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확실히,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가는 미국인과 비교하면 당장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의 피가 체중의 7%인지, 10%인지를 놓고 동료의사와 논쟁이 붙었을 때, 그 해결책으로 함께 책을 찾아보는 길이 가장 빨랐다. 묵직한 서적을 펼쳐놓고 함께 읽노라면 나는 한 페이지를 겨우 읽어가고 있는데, 상대편에서는 벌써 양쪽 페이지를 다 읽고 책장을 넘기곤 했다.
예는 또 있다. 미국인 수련의와 재미있는 소설을 서로 돌려가며 읽은 있었다. 그는 “하도 재미가 있어서 끝까지 읽느라고 새벽 두시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그 책을 빌려 결사적으로 읽어나갔지만, 같은 시간 동안 채 절반도 읽지 못했다. 미국인들과 경쟁하려면 그들보다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해야만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에는 불편이 없었지만, 전화로 빨리 말하는 상대를 만나면 곤경에 처할 때도 있었다. 남들이야 전화상으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그 밤중에 병원으로 뛰어가 직접 대화를 나누고서야 납득이 간 적도 가끔 있었다. 그럴 때면 돌아오는 길에 혼자 쓴 웃음을 짓곤 했다.
아래 연차일 때의 일이다. 하루는 졸도한 노인 환자가 들어왔다. 나는 문진을 시작했는데, 얼마 전 선배 레지던트로부터 의식불명이라는 어려운 학술용어를 사용하면 평균 교육수준 이하의 미국인인 경우 알아듣지 못하니 기절(Pass Out)이라는 쉬운 말을 사용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환자와 대면한 순간 기어코 기억력이 나를 배신했다. 기를 쓰고 기억력을 더듬었지만 선배가 알려준 단어를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 패스 어웨이(Pass Away)하기 전 마지막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나세요?“
환자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도 그럴 것이 ‘패스 어웨이’는 ‘죽는다’는 듯인데, 나는 실수한 것도 깨닫지 못한 채 “패스 어웨이 하고 나면 기억이 잘 안 날 테지만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라”며 환자에게 친절한 격려까지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병실이 발칵 뒤집어졌다. 간호사와 동료의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환자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죽은 거요? 지금 여기는 다른 세상인 거요?”
물론 이 어이없는 사태는 금방 수습되었다. 하지만 외국인 의사의 시련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