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활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 보스턴의 터프츠대학교 의과대학 교직원으로서 보너스를 받은 일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돈이 아닌 무료여행이었다. 미 국방성에서 주관하는 MEND(medical education for national defense)가 텍사스 주 샌 안토니오시에서 항공우주학을 주제로 며칠 간 열렸는데, 주최 측에서 모든 경비와 일등석 비행기표를 내준 것이다. 원래는 터프츠대학의 의과대학에 배정된 것이었는데, 나보다 상위교수들이 아무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내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1960년 1월이었는데,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제트기를 타보았다. 일주일을 머물러 있는 동안 제일 좋은 레스토랑에서 즐기며 호강하기도 했다. 거기서 한국 공군에서 온 계원철 대위(작고, 공군의 무감장교)를 만난 것도 아주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5월에 시행하는 2차 구술시험은 캔자스시티에서 치를 예정이었다. 이 시험은 30분씩 네 번, 두 사람의 시험관으로부터 질의를 받고 답하는 형식이었다. 2차 시험을 치르기 전에 시험관으로부터 주의사항을 전해 들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아침에 질의를 받을 시험관 이름을 미리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수험생들은 자신이 원치 않는 시험관을 회피할 권한이 있습니다.”
구술시험에 앞서 시험관은 수험생에게 “어디서 공부했느냐?”와 같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공평한 시험이었다.
오전 첫 번째 시험은 예전에 내가 즐겨 공부했던, CPC처럼 환자 한 명의 병력을 주고 질의응답 하는 구술면접이었다. 이는 실전 능력을 파악하는 시험으로 외과 전반에 관한 속사포같은 질의에 응답해야 하는 구술시험의 연속이었다.
오전 시험을 끝낸 뒤, 점심시간에 콜라와 샌드위치를 먹고 돌아오던 중 한 동양인과 눈이 마주쳤다. 이 참에 모여서 시험에 임하기로 전 주의사항을 듣고 있을 때, 본 사람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물었다.
“재패니스?”
“노,”
“차이니스?”
“노.”
“코리안?”
“예스.”
우리는 감격의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연세대학교 출신의 이세순(작고, 연대의대 교수, 미국 개업의)이었다.
“시험 끝내고 만납시다.”
오후의 시험은 기초의학 분야였는데, 병리 슬라이드 네 개를 판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시험에는 생리, 병리, 약리, 생화학, 해부학의 모든 분야가 총망라되었고, 엑스레이 해독능력도 포함되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외과의사로서의 결단력과 판단력의 여부를 기초의학 지식과 연계하여 평가했다.
2차 시험을 끝낸 뒤 나는 이세순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에서 외과전문의 시험을 함께 본다는 점에서 서로에 대한 기대감이 컸고, 오랜만에 한국말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그와 나는 앞으로의 포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평생을 친하게 지냈다. 물론 우리 둘 다 2차 시험에 합격했다.
시험에 자신감이 생긴 나는 보스턴으로 돌아와 나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어디에서 환자를 돌볼 것이며, 의사로서 어떠한 소명의식을 가져야 할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의사로서 ‘삶의 질’을 따지자면 마땅히 미국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 미국에 인턴으로 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당시를 돌아보았다. 전시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나를 미국에 유학보내기 위해 도와준 사람들의 뜻을 다시 떠올렸다. 또 내가 미국에 남기로 한다면 가족들이야 미국으로 오면 되었지만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그토록 바라던 합격증이 나왔다. 미 외과의 합격증을 손에 쥐는 순간 나는 귀국을 결심했다. 다시 미국으로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젊은 나였기에 일단 귀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실로 벅찬 가슴을 안고 1960년 7월 마지막 주에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만 6년 만에 귀국하는 것이었다. 내 나이는 만 30년 8개월, 한국 나이로 32세였다. 나를 태운 비행기는 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 호놀룰루를 거쳐 동경에 도착했다.
그 사이 동경이 많이 변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수많은 음식점이 생겼고, 그 건물마다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거리도 안정된 모습이었다. 나는 동경에서 해군시절 나의 상사이자 사교댄스 교습 제자로서 꽤 친밀해진 이승택 씨와 감격적인 해후를 했다. 그렇게 동경에서 사흘을 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김포공항에 나의 두 발을 내디뎠다. 비행기 바로 옆까지 가족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내와 처형, 남동생을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가슴 뭉클한 감정이 난데없이 솟구쳤다. 나는 처형 집에서 이틀을 쉬고 아내와 함께 드디어 부모가 계시는 진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