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2화)
  제1장 소년의 꿈은 인생으로

나는 1929년 11월 13일생이다. 경성부 소격동 157번지에서 출생했다.

나의 아버지 민원식(閔元植)는 1898년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 출신인데, 경기중학교를 건강이 나빠져 중퇴하고 서울에서 치료하다가 건강이 좋아지면서 진주로 이사했다. 맏아들로 태어난 내가 여섯 살 무렵인 1935년이었다.   

유년시절,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말없이 줄곧 책을 보거나 산보를 하는 선비타입이었다. 우리 집은 언제나 조용했기 때문에 공부하기엔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어머니 이시석(李氏碩)은 1899년생이다. 정이 많은 분이라 나는 늘 이웃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때로는 내가 그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두 분은 결혼 후 14년 만에 나를 낳았으니, 그동안 얼마나 나를 기다렸겠는가. 나는 자라면서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네 살 위의 누나와 네 살 터울의 남동생, 그리고 그 밑으로 네 살 터울의 누이동생이 있었다. 현재는 나와 누이 동생 정옥만 살아있다.
 
▲ 유년기의 필자 / 1930년대 초 세발자전거를 탈 정도였으니 부유한 편이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조용한 성품을 지닌 아버지에 비해 조부 민영찬(閔泳贊)은 성격이 활달하고 사교적이어서 친구가 많았다. 어릴 적에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들어가 보면, 조부가 사랑에서 친구들과 모여 앉아 골패를 치는 것을 자주 볼수 있었다. 조부는 증조부를 많이 닮았다. 증조부(閔箕鎬)는 1860년대에 동래 부사(지금의 부산 시장)를 지냈다.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현재 중앙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학생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치는 시험마다 만점을 받곤 했는데, 4학년까지는 조선어로 공부했고, 5학년에 올라가면서 조선말이 폐지되는 바람에 일본어를 사용했다. 당시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면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다른 반 담임인 김두성(金斗星) 선생으로부터 국어, 산수 등을 과외 받았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일본인 담임선생과 김두성 선생, 그리고 아버지가 함께 모여 여러 차례 상의한 끝에 “병철이 성적 정도면 경기중학교에 합격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담임선생님은 학교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나의 경기중학교 진학을 추천했다. 아버지는 건강 때문에 학교를 더 마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던지, 담임 선생님이 경기중학교를 추천하자 크게 환영했다. 나는 내가 경기중학교에 갈 실력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세 분의 조언을 순순히 따랐다.

당시 서울로 오는 교통편은 매우 까다로웠는데, 나는 입시를 위해 진주에서 삼랑진까지 단선 기차를 타고 간 뒤, 삼랑진에서 서울행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이튿날 새벽에 서울에 도착해서는 인력거를 타고 수송동의 한 여관에 투숙했다. 조용한 주택가이면서 경기중학교와도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감안한 것이다.

소집 당일 학교 운동장에서 1시경에 수험번호를 받아들고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받은 뒤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하루 온종일 시험을 치르는 것도 모자라 그 다음 날도 오전까지 시험을 치렀다. 그렇게 경기중학생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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