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을 보호하려는 국내파 의사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국내 의과대학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하루하루가 실망의 연속이었다.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맡겨놓고 아내와 함께 서울의 처형 집에 기숙하면서 나 혼자 취직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나는 먼저 서울대학교 의대 외과 과장 진병호 선생을 찾아갔다.
“진주 도립병원에 가보는 건 어때?”
그러나 그곳에는 의괴대학이 없었다. 무릇 진정한 의사라면 의술로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것만큼이나 학생들과 수련의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야만 한다. 이는 하늘이 부여한 의사로서의 중요한 책무다.
그 다음, 연세대학교 의대 외과 민광식 과장을 만났다.
“당신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지. 공석이 있긴 하지만 이세순이 내년에 들어온 예정이어서 말이야......”
또 거절이었다. 이번에는 수도의과대학의 김웅규 외과 과장을 만났다.
“우리 한국인은 참으로 대단해요.”
앞에서 나를 한없이 추켜세운 그였지만, 거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깝습니다.”
이 정도는 예의를 갖춘 거절에 속했다.
가톨릭 의대 윤덕선 외과 과장의 반응은 노골적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놈들은 여기 있는 의사들과 협력이 안 돼. 한국에 돌아왔으면 다른 병원에서 2년 정도 다시 훈련을 받고 우리 병원에 와야 하는데 말이야. 한국 실정을 제대로 알고 들어와야지. 곧바로 우리 병원에 들어오면 병원 분위기 다 망친다니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병리학 전문의가 돌출 행동을 일삼는 바람에 그 이후로 유학파 의사들에 대한 불신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던 것이다.
부산대학교 의대 장기려 박사는 사람을 시켜서 나를 부산대 의대로 오라고 권했다. 장 박사는 1.4후퇴 때 아들과 함께 남하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는 옛날 민사처에 근무하던 시절, 부산 복음병원을 운영할 때 천막에서부터 시작했으며, 기독교 단체와 외국 원조기관의 기증품을 받아 환자를 돌봐온 아주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러나 부산에는 가기 싫어 내가 거절했다.
나는 계속 일할 곳을 찾았지만, 외국 유학생 출신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 때문에 고민이 컸다. 어렵게 공부하고 돌아왔는데, 이렇게 써주는 데가 없다니 현실은 참으로 야박했다.
그 와중에 해군에서 함께 지내다가 얼마 전 동경에서 만났던 이승택 씨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동경에서 출발한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일할 병원을 결정하지 못했느냐며 질책하듯 물었다.
“수술하고 싶지 않나?”
“왜 아니겠습니까?”
나는 허물없이 지내는 그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렇겠지. 굳이 서울대학교 의대만 고집하는 이유가 뭔가?”
나는 진짜 제자를 기르기 위해 서울대학교 의대 강단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더불어 내가 미국에서 배운 의술을 그대로 가감 없이 전수해도 맏아들일 수 있는 레지던트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우선 백병원에 자네를 소개해 볼게. 외과의사로서 첫발을 내딛으면서, 차차 자리를 알아보자. 어때?
“좋아요.”
당시 백병원의 김희규 병원장(2005년 작고)은 말수가 없고 예민한 스타일이었다.
“우리 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맹장이나 작은 수술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그런 환자만 볼 수 있겠어요?”
그러자 이승택 씨가 말했다.
“닥터 민은 장차 의과대학으로 갈 사람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선 백병원에 근무시키면서 병원을 발전시킬 기회로 삼아보세요. 병원에 크게 공헌할 사람입니다.”
김희규 병원장은 귀가 솔깃했는지, 내 근황을 물어보았다. 나는 지금은 처형 집에 얹혀 살고 있지만, 집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겠노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