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원에 외과의사로 취직하면서 얼마 간 처형 집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돈암동에 집을 마련해 가족 모두를 불러들였다.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세 아이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나는 당시 15만환(61년 화폐개혁으로 단위가 원으로 바뀌면서 가치는 10분의 1로 줄어든다)의 급료를 받았다.
백병원에서는 원장과 스태프 다섯 명을 포함해 모드 일곱 명이 환자를 돌보았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하루 종일 근무했고, 일요일에만 오전근무를 했다. 교회에 다니는 의사들은 대신 오후에 교대근무를 했다.
수술은 일제시대부터 전해지는 구식 시술법을 사용했다. 게다가 수술실의 환경은 참으로 열악했다. 나는 미국에서 배운 대로 시술하면서 환자들과 동료의사들로부터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정형외과 환자가 들어왔다. 개방골절수술을 받은 어린환자였는데, 이미 패혈증에 걸려 있었다. 금방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아이의 몸은 불덩이와 다름없었다. 체온이 41도를 넘어섰으니까.
흰자만 드러낸 채 눈이 뒤집힌 이 어린 환자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모두들 허둥대기만 했다.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면서 환자의 엄마는 이마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됩니다.”
나는 간호사에게 얼음물과 타월 열 장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 얼음물에 적신 타월로 발가벗긴 아이를 쿨링(Cooling)해주고, 불덩이 같은 전신을 계속 해서 얼음찜질을 했다.
30분 가량 지났을까. 떨어질 줄 모르던 열이 내려갔고 마침내 아이는 눈을 떴다. 간호사와 환자의 부모 모두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얼음찜질로 해열시키는 방법이 생소했던 것이다.
백병원에서 나는 또 다른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의 후배로서, 그리고 훗날 개업의로 전향할 때는 파트너로서 함께 했던 원치규 선생은 은퇴한 지금까지도 그 인연을 끈끈하게 이어오고 있다.
원래 그는 공군에 군의관으로 가 있다가 역으로 서울대학교 의대에 파견 나온 레지던트였다. 그는 환자의 수술케이스에 대해 더 배우고자 밤마다 백병원에 와 근무하다가 나와 만났다. 이북출신으로 성격이 무던한 원치규 선생은 내 시술을 자주 도와주면서 나와 허물없는 사이로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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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국하고 병원에 취직을 못하고 와신상담 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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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것을 도와준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전상옥 씨다. 그는 일반직 직원이었는데, 의료 지원을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내가 들어가는 수술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를 잘 따랐다. 나는 그가 마취하는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병원 측에 선처를 부탁했다. 그 당시만 해도 마취의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외과의사가 번갈아가며 마취를 할 때였다.
한번은 우물을 파내려가다가 낙석에 머리를 맞고 실신한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외상은 미비했지만 의식이 없는 환자였다. 다른 의사가 큰 병원에 환자를 데리고 가보라고 권했다.
“돈도 없소,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죽을 것 아니요? 죽어도 여기서 죽겠소!”
보호자들은 완강히 버텼다.
외상 환자를 내려다보며 나는 보스턴의 응급병원에 근무할 때 수없이 봐왔던 경험을 떠올렸다. 나는 기계실로 달려갔다.
“드릴 있습니까? 손으로 돌리는 거!”
“녹이 슬어 더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만.”
나는 그것을 얼른 받아 녹을 긁어낸 다음 소독하고 삶았다. 그 다음, 환자의 머리를 면도한 후 드릴로 두개골을 뚫고 자주막을 절개하여 밑에 고여 있던 피를 배출시켰다. 환자는 얼마 후에 눈을 뜨고 의식을 되찾았다.
환자 측 입장에서는 내가 대단한 의사처럼 느껴졌겠지만, 사실 보스턴에서 많이 해본 수술이었던 지라 나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다른 의사들과 환자들의 박수를 받았지만 나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만날 맹장수술이나 탈장수술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거의 80%이상이 이렇듯 간단한 수술이었다. ‘이런 수술이나 하려고 미국까지 가서 어렵게 공부하고 돌아왔단 말인가’ 하는 허탈감이 들었다.
서울대학교 의대에 자리가 나려면 5년은 족히 지나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7월에 귀국해서 12월쯤 되었을까.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이후 나는 백병원의 한 구석에서 조그마한 타이프를 끌어안고 매일 미국으로 편지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희규 원장이 나를 불렀다.
“다시 미국에 가려고? 자네는 한국 외과를 개척해야 하지 않나? 서울대 의대에 이야기 해보겠네. 처음엔 좀 그렇겠지만 기다리다보면 좋은 소식이 올 것이네.”
김희규 병원장이 나세진 학장과 협상을 할 모양이었다.
“백병원에서 강사료에 해당하는 급여를 서울대에 기부하고 강사 대우로 자네를 편입시키도록 하지, 어때?”
내 생애에서 가장 절박하고 중요한 순간 중의 하나였다. 서울대학교 의대 나세진 학장이 나를 불렀다. 나는 즉시 그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보자,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김 박사가 그토록 자네를 배려하는 거지?”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외과 과장 진병호 선생에게 보냈다.
“참 질긴 사람이군. 그러나 교직원 명단에 ‘호적’도 없고, 교수실도 가운이 없으니 알아서 하도록 하게. 괜찮겠나?”
“상관없습니다. 자유롭게 들락거리도록만 해주시면 됩니다.”
“마음대로 하게.”
“고맙습니다.”
나름대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왔지만 속으로는 천불이 끓어올랐다. 젊고, 자존심 강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며 굳이 한국에 있어야만 하는지 자괴감이 불쑥불쑥 솟아 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선택한 것이니만큼, 일단 내 뜻을 펼쳐나가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기로 결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