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 하면 야간 수술 중에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치프 레지던트 박귀원(현 서울대 소아외과 교수, 대한 여의사회 회장)은 서울대학교 의대 외과 여의사 1호다. 그녀는 굉장히 악바리였다. 그날 나는 식도정맥류가 터져서 출혈이 심한 환자의 정맥을 꿰매기 위해 개복을 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 복부절개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고, 차선책으로 가슴을 열어 식도를 절개해야만 지혈이 가능할 판국이었다. 가슴 절개에 필요한 기계를 소독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지시했다.
‘닥터 박, 거즈를 출혈부위에 대고 손가락으로 꽉 누르고 있어라.“
그러는 동안 잠시 짬이 생겼다. 5분이었던가, 10분이었던가. 나는 소파위에서 잠깐 졸았다. 의사는 수술 도중 피로하거나 머리가 제대로 회전되지 않을 때, 잠시 눈을 붙인 뒤 맑은 정신으로 수술하는 것이 길게 봐서는 환자를 위해서도 능률적이다.
기계가 소독되고, 환자의 가슴을 열고 식도를 절개한 후, 닥터박이 누르고 있던 거즈로 떼 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환자의 피가 멈춰있었다. 출혈을 멈추는 수술을 하기 위해 기계소독을 지시하고 기다리는 사이에, 식도의 출혈흔적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곁에 있던 닥터 박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내 손이 아닌 것 같네요. 감각이 없습니다.”
닥터박이 30분 동안 워낙 식도를 잘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개복하여 꿰매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한참을 주시하고 있다가 마침내 수술을 끝냈다 지혈압박을 지속하는 것이 실로 꿰맨 것과 마찬가지의 지혈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경험하게 된 일화였다.
수술 중에 어려운 일도 참 많았다. 어느 날 버거씨 병(Buerger's disease)으로 고생하는 환자가 들어왔다. 이 환자의 발가락은 심한 세균 감염으로 말초혈관이 막혀버린 탓에 혈액순환이 안 되어 아무리 항생제를 투여해도 치유가 되지 않았다. 끝내는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당시 상업은행 본점 차장으로 근무한다던 그 환자는 40대 초반이었다. 환자의 보호자들은 다른 병원에서 환자의 무릎 위를 절단하겠다고 해서 이 병원으로 왔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병원의 결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무릎 아래로 절당하면 염증이 재발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아예 무릎 위까지 절단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었다.
의사로서는 책임질 여지를 제로로 만드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환자의 입장에서 무릎 위 절단과 무릎아래 절단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나는 환자의 무릎을 살려내기 위해 재차 정밀검사를 하고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살려보자!”
결단하기가 어렵지 다리를 절단하는 일은 간단했다. 세균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 봉합할 때도 철로 된 실을 사용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 후 환자가 병실에서 회복을 기다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수술 소문을 듣고 당시 정형외과 한문식 과장이 나를 불렀다. 나보다 10년쯤 선배인 그는 연구실에 들어선 나를 보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야, 이 자식아! 이젠 졍형외과까지 넘봐?”
‘아차!’
사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절단 수술은 정형외과에서 수술하는 것이 관례였다.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다리 절단 수술을 할 때 절단을 하게 만든 질병이 어느 과와 관련이 있는지에 따라 해당되는 과의 수술의가 집도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무심코 수술하게 되었다고. 일부러 정형외과 환자까지 손대려 했던 의도는 아니었다고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잘못했습니다.”
얼마 후, 서혜부탈장으로 보이는, 돌이 채 안 되는 영아 환자가 들어왔다. 탈장이라면 일반외과 환자일 것이고, 수종이라면 비뇨기과로 보내야 할 텐데, 솔직히 탈장인지 수종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보호자가 다급하게 굴기에 내가 수술하기로 결정하고 수술실로 옮겨가던 중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비뇨기과 주근원 과장이 달려왔다.
“이젠 아이 수종까지 넘봐?”
또 다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비뇨기과 수술까지 하려고 그러는 건가?”
결국 수술을 포기하고 비뇨기과로 전과시켜야 했다.
외과 동료 교직원들과도 간혹 문제가 발생했다. 동료교수가 췌장암 환자의 췌장을 부분적으로 걷어내지 않고, 전부 들추어내는 바람에 환자가 걷잡을 수 없는 당뇨증세를 보이게 되었다. 당뇨수치를 재면서 동분서주하던 레지던트는 얼마나 다급했던지 나를 찾아와 어찌해야 되는지 조언을 구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응급조치 방법을 알려주면서 친절하게 참고문헌까지 제시해주었다. 이튿날 그 레지던트가 다시 나에게 찾아와 인사를 꾸벅했다.
“환자의 상태가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복도에서 그 환자를 수술했던 동료교수와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의 뺨을 우려 갈길 듯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느닷없는 행동에 나는 깜짝 놀랐다.
“왜 이래?”
“이 자식아! 왜 이러느냐고? 이젠 내 환자까지 네가 간섭하겠다는 거냐?”
그제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순수한 의도에서 레지던트의 질문에 답변해준 것뿐이었는데, 그 레지던트는 내게서 배웠다며 그 교수에게 곧이곧대로 이야기 해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그런 오해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나는 그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거듭 사과했다. 하지만 착잡한 기분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본질적인 의학이나 의술문제에 대한 건전한 잡담회나 토론이 아닌, 사소한 문제로 사사건건 부딪히는 현실이 무척이나 피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