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술실에서 수련의나 간호사들에게 버럭 소리 지르는 것을 참으려고 노력했다.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침묵해버리든지 크게 한숨을 내쉬는 편을 택했다. 그러나 조수나 간호사들은 바들바들 떨었다.
수련의들은 알아서 모두 조심스럽게 처신하여 내가 원하는 수위의 조력을 뒤늦게 발휘했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내 속은 까맣게 타고 또 탔다.
강사가 된지 1년 만에 나는 조교수로 승진했다. 그때가 1962년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내 수술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알려지면서 외과 과장인 진병호 선생과 어색한 관계로까지 변화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나세진 학장의 후임으로 취임한 명주완 학장이 나를 호출하더니, 매부이자 OB맥주 사장인 박두병 씨의 췌장 수술에 들어가라고 했다.
“진병호 과장이 집도를 할 테니까, 민 군은 조수로 들어가게.”
나는 기꺼이 조수로서 수술실에 들어갔다. 개복을 하고보니 호두만한 종유가 들어앉아 있었다. 복부수술 중 가장 복잡한 휘플(Whipple)수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진병호 선생은 이것을 보고 잘라내지 않은 채 단순 위장분합술만 시행하고 배를 꿰맸다.
이 소문이 병원에 나기 시작하면서 환자의 집안에까지 알려져 결과적으로 명주완 학장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명주완 학장은 진병호 과장에게 환자로부터 손을 떼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고는 또 다시 나를 불렀다.
“진 과장에게 손을 떼라고 했으니까, 자네가 휘플 수술을 다시 해줘야겠어.”
‘아니, 과장의 수술을 뒤엎고 조교수에게 재수술을 하라고?’
이 소문 역시 천리마가 되어 병원 구석구석을 방정맞게 넘나들었다.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할 지 참으로 난감했다. 처음 서울대학교 병원에 와서는 체면이고 뭐고 따지지 않은 채 다방 출근에서부터 시작하여 응급실, 수술실, 강의실로 옮겨온 나였지만, 그간 동료 의사들로부터 압박을 받을 만큼 받아서 이젠 소위 눈치라는 것이 생긴 마당이었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병호 과장이 수술한지 일주일 만에 재수술 날짜가 잡혔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진병호 과장이 내게 찾아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술에 가담하지는 않을 테니 옆에서 견학할 수 있겠나?”
깜짝 놀랐지만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었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매우 긴장된 상태에서 꼬박 여덟 시간의 대수술 길에 올랐다. 진병호 과장은 꼼짝하지 않은 채 내가 수술하는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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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의대 조교수 시절 / 아랫줄 가운데가 필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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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의대 조교수 시절 / 왼쪽에서 2번째가 필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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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치프 레지던트는 이경욱(현 용산에서 개업 중), 담당 주치의는 1년 차 레지던트 주홍재였다. 또한 환자의 넷째 아들인 박용현(훗날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장 역임)은 당시 의예과 학생이었고, 환자의 생질인 이종원은 엑스레이과 레지던트였다.
성공적인 수술 덕분에 환자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진병호 과장과 나는 서먹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10년 후 박두병 씨가 다른 병으로 작고할 때까지 췌장의 병은 재발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환자와 환자 가족들에겐 희소식이었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는 압박의 정점에 서는 계기가 되었다. 못나도 말이 많고 튀어도 말이 많은 걸로 치면 이 나라 이 땅, 한국이 세계 최고 금메달감이라는 서글픈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동료의사들과는 이런저런 사연들이 많았지만, 환자들이나 그들의 보호자들과는 친근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 무렵만 해도 큰 수술이 끝나고 나면 그날 저녁에는 술자리가 열리는 것이 관례였다.
박두병 씨를 수술한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생질인 민병준(광고주협회장, 방송위원) 씨와 환자의 맏아들인 박용곤(두산그릅 명예회장)씨는 저녁마다 나를 납치하여 술자리에 앉혔다. 숧 자리가 파한 뒤, 귀갓길을 내달리는 차는 항상 병원 앞을 거치곤 했다. 자연스레 나는 병원에 들러 입원실에 있는 환자를 한 번 더 보고 나서 돈암동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출근하려고 대문을 나서면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병원에 이르면 그 환자가 있는 입원실에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환자를 자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보게 하는 고도의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수술 전날에는 환자의 보호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술 석 잔을 마시는 것으로, 말하자면 수술 전야제를 마쳤다. 수술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많이 마시자는 것이었다. 밤 10시쯤 내가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다음날 수술을 끝마치고 나면 다시 나를 앉히고 술을 권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사양했다.
“다음 환자는 어쩌라고 자꾸 권하는 거요?”
“기본 실력이 있는데 뭐 어떻습니까?”
환자 가족의 심리가 이렇다. 나는 예의상 술잔을 받아들었다가 적당한 선에서 자리를 떴다. 정말이지 다음 날은 대수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