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짐을 챙겼다. 귀국을 결심하면서 비로소 차이나 메디칼 보드의 뉴욕본부를 찾아갔다. 이 재단은 록펠러재단 산하로 2차 대전 전에는 종국 베이징대학을 중점적으로 지원했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중국과의 인연이 끊어지는 바람에 후원과 원조를 서울대학교에 집중시켜서 교수들의 교환연수 추진과 함께 많은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 후원의 상징으로 콜드 박사가 서울대학교 병원에 2년째 상주하고 있었으며 미네소타대학 교수를 서울대학교로 보내 연구하도록 주선하는 한편,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미국 연수도 주선했다. 그밖에 연구비 지급까지도 관여하고 있었다.
나는 연구비 지원을 요청했다. 내 이력서와 경력을 보고 그들은 흔쾌히 승낙했고 비행기표까지 챙겨준 덕에 나는 행복하게 귀국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1964년 1월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왜 미국에서 살지 않고 돌아왔지?”
동료교수들의 질문에 나는 호쾌하게 웃으며 답변했다.
“하하하하. 당신들이 좋아서 왔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그들의 따가운 눈길을 처음으로 홀로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 길로 외과 과장과 학장을 차례로 찾아가서 보고했다. 나는 대학교수는 환자만 진료해서는 안 되며 연구업적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소신 있게 말했다. 사실 그간 환자의 수술은 많이 다뤘지만 창조적인 연구에 매달릴 겨를이 없었다고 얘기하자 두 사람 모두 내 의견에 동조했다.
“개를 가지고 간이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연구비는 록펠러재단에서 제공한다고 했습니다.”
“수고했네.”
교수에서, 연구하는 개척자로 영역을 넓혀가면서 수술도 하고 학생들도 가르쳤다. 매일 매시간, 분초를 다퉈가며 사용해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내 다른 과에서 또 다시 제동을 걸어왔다. 전보다는 덜했지만 여전히 신경에 거슬려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수술실에서 살다시피 했고, 밤이나 휴일에 시간이 나면 나름대로 개의 간 이식수술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의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이 아닌 동물을 대상으로 한 간이식수술이라고 할지라도, 혼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러 사람이 팀을 이뤄 두와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였다. 개를 먹이고 키워줄 사람과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시간은 모자라고 사람과 장비는 한없이 부족한데다 개를 한번 수술하려면 난리를 쳐야 하는 것이 번번이 부담스러웠다. 모든 것이 생각한대로 뒷받침 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실험을 했지만 가망이 없었다.
비록 개의 실험은 어려웠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신장이식 수술은 어렵지 않게 할 자신이 생겼다. 그런데 또 신장이식에 대한 연구를 놓고 비뇨기과에서 제동을 걸었으니, 결국 나는 좌절하고 말았다. 1964년은 1년 내내 이런 식의 일들 때문에 유난히 힘든 한해였다.
‘서울대 의대 교수 생활은 한계가 있구나. 모든 일이 귀신같이 막혀버리니 말이다.’
그 생각을 하고는 나는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야간개업을 허용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여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넘쳐나는 환자를 묵정동 제일병원과 백병원에 데려가 수술했고 입원비와 식비는 병원 측에게, 수술비는 집도한 나에게 돌아왔다.
이렇게 부수입이 생기자 일부 동료 교수들이 개업의를 겸직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도 자연스럽게 개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서울대 교수로 평생을 지내봤자 의사로서, 학자로서 얼마나 발전할 수 있겠는가. 그 생각을 할 때면 확실하게 한계를 느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기반이라도 마련하는 것이 훗날 가족을 위해서 옳은 일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막상 개업을 생각해보니, 진찰실과 대기실로 구성되어 있는 내과나 소아과와는 달리 외과는 규모도 커야했고, 수술실 관련 시설과 입원실이 필수로 구비되어야 하는 것이 커다란 걸림돌로 다가왔다.
레지던트와 간호사 확보는 물론이거니와 당장 입원실이며 수술실이며 당직실과 수술실, 그리고 수술 장비들, 간단한 검사시설과 엑스레이까지 갖춰야만 외과를 개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좀체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느 날 외과 레지던트 이병봉 군의 부친 이담 씨가 심한 급성 췌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 분은 경상북도의 명문가 출신으로서 그의 장형 이활 씨는 일제시대에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뒤 고려대학 재단이사장으로 계셨고, 동생 이호 씨는 동경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장관을 세 번이나 역임한 분이었다.
환자 이담 씨는 공부보다는 사업을 택했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술을 많이 즐겼는데, 심한 췌장염을 앓고 있는 동안 DT(알코올 진전섬망,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술을 끊으면 오는 금단현상)라는 병발증까지 생긴 것이었다. 나는 이 DT를 미국에서 많이 봤지만, 한국의사들은 볼 기회가 없는 모양이었다.
심하게 요동치는 이 환자의 혈관에 알코올을 투여하자 증상은 금방 치료되었다. 원래는 내과에서 맡아야 할 환자였는데, 어쩔 수 없이 외과의사인 내가 치료해야 했다.
툭하면 진료의 영역을 자로 잰 듯이 따지는 동료교수들도 자기들이 감당 못하는 환자를 만나게 되면 마지못해 내게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게다가 레지던트 이병봉 군의 간곡한 사정도 있고 해서 정말 최선을 다해 보살핀 끝에 건강한 몸으로 퇴원시키게 되었다.
